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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정조가 사랑한 책가도, 현대 미술·디자인에 스며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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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5호 26면

[영감의 원천] 조선시대 책장 그림 

“화원 신한평과 이종현 등은 각자 원하는 것을 그려 내라는 명이 있었으면 책거리(冊巨里)를 마땅히 그려 내야 하는 것이거늘, 모두 되지도 않은 다른 그림을 그려내 실로 해괴하니 함께 먼 곳으로 귀양 보내라.”

서가 풍경을 그린 한국의 독특한 채색화 ‘책거리’. 미술사학자 강관식에 따르면, 옛 문헌에 ‘책거리’라는 말이 처음 보이는 것은 정조 12년(1788) 『내각일력』(규장각일기)에서다. 이 단어가 등장한 계기 자체가 흥미롭다. 국왕 직속의 최고 화가들인 차비대령화원이 정기 시험에서 책거리를 그려내지 않자, 책거리의 열렬한 애호가인 정조가 크게 꾸짖은 것이다. 본인이 “그림 주제는 자유다”라고 해놓고선 말이다!

이탈리아 선교사 그림에 영향 받아

사진 1. 이형록의 ‘책가도’(19세기). [중앙포토]

사진 1. 이형록의 ‘책가도’(19세기). [중앙포토]

이런 보스를 만나면 부하 직원은 고통이다. “응, 알아서 해~”라고 해 놓고는 “알아서 하라면 알아들었어야지!”라고 뒤통수를 치니 말이다. 이는 정조의 책거리 사랑이 그토록 컸다는 것과 흔히 ‘개혁 군주’로 알려진 그에게도 꼰대 기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다. 정조는 책거리를 ‘책가도(冊架圖)’라고도 불렀는데, 초기의 궁중 책거리는 모두 서가에 정돈된 상태의 책과 기물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사진1)

아마도 책거리는 한국의 옛 그림 중에서 현대미술과 디자인에 가장 많이 차용되는 그림일 것이다. 한 예로, 2019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디자인 위크 행사로 열린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수묵의 독백’ 전시에는 책가도를 꼭 닮은 전시대가 등장했다.(사진3) 예술감독을 맡은 정구호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당시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이탈리아 선교사로 청나라에 정착해 궁중 화가를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투시법과 명암법을 통해 그린 그림이 우리 책가도의 원류라고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책가도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다.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우리만의 전통 책가도를 보여주자 생각했고 그 자체가 너무 화려하면 전시된 작은 소품들이 가려질 수 있어 투명한 플라스틱과 백동 장석만으로 제작했다.”

정 감독의 말처럼 18세기에 처음 나타난 궁중 책가도는 서양식 투시원근법을 받아들였다. 내용 또한 중국에 온 이탈리아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1688~1766)를 통해 전해진 유럽의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 또는 ‘분더카머(Wunderkammer)’의 영향을 받았다. ‘호기심의 방’은 진귀한 물건을 모아놓은 작은 박물관이나 그것을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이렇게 20세기 이전에 드물게 서구 영향으로 탄생했으면서 한국 고유의 양식으로 발전한 독특하고 국제적인 그림인 것이다.

책가도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사랑과 후원 덕분이었다. 『홍재전서』에 따르면, 심지어 1791년 정조는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 병풍을 놓는 관례를 깨고 대신 책가도 병풍을 펼쳐놓기도 한다. 그리고는 대신들에게 혹시 진짜 책장으로 착각한 사람 있냐고 묻고 “사실 책이 아니라 그림일 뿐이다” 하고 함께 웃기도 한다. 동아시아 회화 전통을 벗어난 서양화적 투시원근법의 3차원 착시 효과를 즐긴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요즈음 사람들은 글에 대한 취향이 완전히 나와 상반되니, 그들이 즐겨 보는 것은 모두 후세의 병든 글이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 그림을 만든 것은 대체로 그 사이에 이와 같은 뜻을 담아 두기 위한 것도 있다.” 그 이듬해 그가 단행할 ‘문체반정’의 불길한 그림자를 던진 것이다.

사진 2. 홍경택의 ‘서재 ’(1995~2001). [사진 홍경택]

사진 2. 홍경택의 ‘서재 ’(1995~2001). [사진 홍경택]

책가도처럼 국제적이고 새로운 그림을 애호하고 발전시킨 한편, 거기에 ‘문체반정’이라는 폐쇄적이고 복고반동적인 이념을 담는 것. 대신들과 트롱프뢰유(눈속임그림) 효과를 즐기는 여유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취향이 아닌 글은 “병든 글”로 배격하며 말 안 해도 알아들으라고 강요하는 것. 이것이 정조의 양면적이고 복합적인 면이다.

한편으로 이 일화가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책가도의 생산자가 뛰어난 테크닉의 궁중 화원들이었으며 소비자는 왕인 정조와 사대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책거리인 책가도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대로 ‘민화(民畵)’라고 할 수 없었다. 학자들은 책가도를 궁중화로 분류하고 그 후 민간에 퍼진, 보다 자유분방한 도상의 책거리를 민화로 분류하곤 한다.

궁중화풍 책가도에는 책과 지식에 대한 선비들의 오랜 존경과 함께 사물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알고자 하는 개방적인 사고도 담겨 있다. 그래서 책과 벼루, 연적 같은 문방구 외에도 많은 물건이 등장한다. 고대 중국의 청동 제기, 청나라 시대 홍유(紅釉) 자기, 산호 가지에 매달린 회중시계와 안경 등 서양에서 온 신문물, 부처의 손을 닮은 남방의 열매 불수감(佛手柑) 같은 진귀한 과일 등등…. 모두 당시 조선 상류층이 동경하던 물건들이다.

이와 관련해 미술사학자 고연희는 이렇게 말한다. “책거리의 주제는 진귀한 물건들을 보고자 또 소유하고자 하는 물질적 욕망이다. 이 욕망은 도시 문화의 발달과 문화적 물품의 생산, 그리고 자본의 발달 등 사회적 배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19세기가 되고 사대부 외에 신흥 부유층이 나타나면서, 그리고 그들 또한 “하나 갖추고 있어야 축에 빠지지 않는” 책거리 그림을 열망하면서, 책거리가 드디어 민중의 그림인 민화의 영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민화풍 책거리에서는 서양식 투시원근법이 사라지고, 책과 기물이 마치 둥둥 떠 있는 듯 여백에 배치되거나 원근법이 무시된 채 쌓여있다.

이것이 그림 기법의 퇴화가 아니라 대중의 취향에 맞춘 변화였다는 것은 차비대령화원 출신 이형록(1808~1883)의 그림 변천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이형록은 57세인 1864년에 이응록으로 개명했는데, ‘이응록’이라는 후기 이름으로 내놓은 책거리 병풍을 보면 서가가 사라지고 책과 기물만 공중에 둥둥 떠 있다. 더 이상 서양식 투시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평행원근법을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들어 독특한 도상 재조명

사진 3. 정구호의 밀라노 디자인 위크 전시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수묵의 독백’의 전시대. [중앙포토]

사진 3. 정구호의 밀라노 디자인 위크 전시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수묵의 독백’의 전시대. [중앙포토]

궁중화 책가도와 달리 민화 책거리는 표현이 훨씬 자유분방하고 기발하다. 반면에 묘사된 물건들은 책가도처럼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반영하는 기물보다는 전통적으로 출세와 신분상승, 부귀영화의 기복적 상징으로 쓰인 과일과 꽃, 상서로운 동물이 주류를 이룬다. 근대 시민으로 발전하지 못한 당시 신흥부유층의 한계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 후 책거리 전통은 20세기 중반 한국전쟁 등의 격동을 거치며 그 맥이 잠시 끊겼다가 1960년대에 와서 민속연구가 조자용(1926~2000)에 의해 재조명받으며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말부터 책가도의 국제적 기원과 독특한 도상이 학문적으로 부각되면서, 현대미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이 본격적으로 책거리를 작품에 응용하기 시작했다.

책거리에서 영감을 받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여러 현대미술 작품 중에 홍경택의 회화 ‘서재’ 시리즈가 있다. (사진2) 작가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전통 책가도를 보며 무엇보다도 그 구조에 매혹되어서 ‘서재’ 시리즈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책은 수직적·수평적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수평은 자연과 합일, 종교 등과 연관될 수 있고, 수직은 ‘개념을 세운다’는 식으로 인간이 정립하는 이념 개념 등과 연관될 수 있다. 그런 책들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 초기작 중 책이 빽빽하게 들어찬 그림들은 인간의 지식이 만든 바벨탑에 대한 경외감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20여년간 이 주제를 발전시켜 오면서 후기로 오면 정보의 홍수와 정보의 독점을 다루는 그림도 있다.”

홍경택의 ‘서재’ 연작은 해외에서 특히 인기가 많다. 개항 이전에 드물게 국제적 영향을 받은 한국 고유의 그림 책거리가 이제 다시 현대미술가와 디자이너의 창조적 변용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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