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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재갈법'도 추미애의 흔적이?…"법무부 상법개정안이 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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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여당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강행 처리한 언론중재법의 시발점은 어디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 “지난해 법무부가 입법예고했던 상법 개정안을 그 출발점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답하는 인사들이 여권 내부엔 꽤 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의 직무집행정지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 인용 이튿날인 경기 과천 법무부청사에서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뒤편에는 그를 응원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뉴스1

지난해 12월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의 직무집행정지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 인용 이튿날인 경기 과천 법무부청사에서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뒤편에는 그를 응원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뉴스1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20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정부가 당초 상법 개정안을 통해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입법화하려고 했다”며 “이러한 계획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추미애 전 장관”이라고 말했다.

검찰개혁뿐만 아니라 ‘언론재갈법’ 추진 과정에서도 추 전 장관이, 특히 초반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이다.

추 전 장관은 지난해 9월 23일 자신이 서명한 법무부의 상법일부개정안과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입법예고한다고 밝혔다. 증권 분야 등에 제한적으로 시행되던 집단소송제를 모든 분야로 확대하고, 언론 보도에도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물릴 수 있게 한 내용이 핵심이다. 구체적으로는 언론 보도를 기업의 제조물과 동일하게 취급해 손해액의 5배까지 배상하게 하고, 다른 법률보다 우선 적용하도록했다.

법무부는 이러한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며 “최근 범람하는 가짜뉴스와 허위 정보 등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위법 행위에 대한 현실적인 책임 추궁 절차나 억제책이 미비한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9월 생중계된 민주당의 유튜브 회의 채팅창에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을 응원하는 의미의 '우리가추미애다'라는 태그가 이어지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해 9월 생중계된 민주당의 유튜브 회의 채팅창에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을 응원하는 의미의 '우리가추미애다'라는 태그가 이어지고 있다. 중앙포토

주목할 점은 언론에 대한 초강경 징벌법안이 입법 기관인 국회가 아닌 행정부인 ‘정부입법(政府立法)’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정부입법은 대통령과 청와대의 정책적 목표 실현을 위해 사실상 입법권이 있는 정부의 '손'을 빌린다는 의미에서 정치권에선 ‘청부입법(請負立法)’으로도 불린다. 이 때문에 야당 일각에선 "‘언론보도에 재갈을 물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 처음부터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의 상법 개정 시도는 지난해 12월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정부 관계자는 “당시 정부법안은 가짜뉴스에 대한 규정 자체가 모호한데다, 헌법에 명시된 언론자유의 문제를 일반 공산품과 동일 선상에서 취급하려 했던 것, 과도한 징벌의 수준 등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며 “특히 당시 복잡한 정치 상황도 일부 고려가 됐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법무부를 통해 언론 보도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무부의 정부입법을 앞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조직적 방역 방해·가짜뉴스 유포, 반사회적 범죄 주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은 법무부를 통해 언론 보도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무부의 정부입법을 앞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조직적 방역 방해·가짜뉴스 유포, 반사회적 범죄 주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뉴스1

법무부가 입법예고 단계에서 ‘최근 가짜뉴스가 범람하고 있다’고 규정했던 당시는 ‘조국 사태’를 거친 뒤 추 전 장관의 아들의 병역 특혜 의혹 등이 쟁점이 되고 있을 때였다.

추 전 장관은 지난해 12월 해당 법안의 국회 처리 시도 단계에서 “두 눈 부릅뜬 ‘깨시민(깨어있는 시민)’이 언론에 길들여지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냉철한 판단과 감시가 계속되지 않으면 검찰권과 사법권도 민주주의를 찬탈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며 자신과 관련한 의혹을 연일 보도했던 언론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이 무렵 민주당 홍익표 의원은 “추 장관이 법조기자단을 해체했으면 좋겠다”며 “진보매체인 한겨레, 경향신문과 KBS, MBC부터 법조기자단에서 빠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이 발언에 대해 “개별 의원의 발언이 아닌 여권 전체의 공감대가 표출됐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당장 야권에선 “입법ㆍ사법ㆍ행정을 장악하더니 언론마저 독재의 선전장으로 만들겠다는 문재인 정권의 선전포고”라는 비난 성명이 잇따랐다. 여권에서도 “언론 편가르기로 오해될 수 있는데다, 공영방송의 정치성향까지 마음대로 규정한 것은 너무 나간 말”이라는 비판이 일며 입법을 추진하던 정부에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도종환 위원장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고의·중과실로 허위·조작 보도를 할 경우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국민의힘의 반발 속에 단독 처리했다. 뉴스1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도종환 위원장이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고의·중과실로 허위·조작 보도를 할 경우 최대 5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국민의힘의 반발 속에 단독 처리했다. 뉴스1

결국 상법을 바꿔 직접 ‘언론을 길들이겠다’는 정부의 '정면돌파' 계획은 사실상 철회됐다. 그러자 국회 과반의석을 점유한 여당이 ‘바통’을 이어받았고, 그 결과물이 지난 19일 국회 문체위를 통과한 언론중재법인 셈이다.

특히 강경 지지층의 눈치를 봐야 하는 대선 주자들은 “5배는 약하다. 악의적으로 가짜뉴스를 내면 언론사를 망하게 해야 한다”(이재명 경기지사), “현직 기자였으면 환영했을 것”(이낙연 전 대표)이라며 여당의 독주에 기름을 부으며 가세했다. 추 전 장관도 “징벌적 배상제도는 이미 지난해 12월 상법 개정안을 내놨다”며 자신이 ‘원조’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언론중재법 처리 과정에서 “국회의 일”이라며 선을 그어왔다. 내부에선 “우리와는 상관없다(None of my business)”라는 말도 나왔다. 그러다 법안이 상임위 문턱을 넘은 뒤에야 “잘못된 언론 보도로 인한 피해구제가 충분하지 않아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입법적 노력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자신들은 무관한 척 선을 긋다가 강행처리가 완료되자 은근슬쩍 여당의 손을 들어주는 뉘앙스였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앞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규탄하고 있다.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여당 단독으로 처리됐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앞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규탄하고 있다. 언론사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여당 단독으로 처리됐다. 연합뉴스

여권의 고위 인사는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여권 지지층의 90%가 찬성하는 상황에서 대선 후보는 물론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어떻게 할 방법이 있겠느냐”며 “지지층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정치적 상황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했다. 결국 정치적 의도에 의한 입법 폭주였음을 시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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