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① 시- 고형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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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토콘드리아에 사무치다'

가마득한 봄날 새 학기 교과서에서 배운 미토콘드리아의 꿈이

땅거미 속에 찢어진 날개를 치고 있다

뜻밖에 어딘가로부터 그들이 찾아왔다는 사실

아무도 없는 집 마루 안, 마당을 등진 거울에

다친 얼굴을 집어넣고 싶었던 날들, 그 오랜 뒷날의 구서울

나는 그대들을 본 적이 없다 저녁처럼 풀처럼 살아가고 있어

꽃과 잎이 같이 피는 애오개 목마름쯤,

문 닫은 도서관 얼룩진, 건너편 붉은 보도블록 근처

먼지만한 미토콘드리아의 신기루 조각들이 날아다니고 있다

봄밤, 들어오는 차 돌아가는 차 모든 지붕에

죽은 자들이 걸어가는 저 슬픈 시간 속, 미토콘드리아들이여

전조등은 밝고 미등은 슬프지? 아니 슬프지 않다

아주 잊혀진 교과서 속 숨결의 미토콘드리아들

망사 그림자, 침묵의 호명 그 망막에 걸려 찢어지며 통과한다

(문예중앙 2005년 가을호 발표)

◆ 고형렬 약력

▶1954년 강원 속초 출생 ▶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청봉 수박밭'(85년) '성에꽃 눈부처'(98년) '김포 운호가든 집에서'(2001년) '밤 미시령'(2006년) 등 다수 ▶지훈상(2003년) 일연문학상(2006년) ▶2006년 미당문학상 후보작 '미토콘드리아에 사무치다'외 15편

시 쓰게 하는 내 안의 무엇
'난 무엇인가'묻고 또 묻고

시인은 어제 일본에서 돌아왔다. 히로시마에서 열렸던 시집 '리틀보이' 일어판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온 길이었다.

감회를 물었더니 "히로시마에도 유도화가 빨갛게 피어있었다"고 짐짓 담담하게 답했다. 히로시마 원폭을 노래한 우리 시집이 원폭 61주기에 맞춰 히로시마에서 발간된 날, 시인은 되레 울적했는지도 모른다.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의 주요 단골 중 하나가 고형렬 시인이다. 올해도 또 올라왔다. 그래서 이번엔 슬쩍 욕심을 내비칠 듯도 싶은데, 시인은 "후보로 선정된 것만으로도 감사한다"며 한껏 예의를 갖췄다.

지난해 최종심 후보 인터뷰 기사를 들춰봤다. 맨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 고형렬의 변화를 조심스레 점쳐본다.' 한 해 전에 조심스레 점쳤던 시인의 변화를, 이제는 작정하고 말해야 할 때인 듯싶다. 시인은 분명 변했다. 시인도 "최근엔 시병(詩病)에 걸린 것 같다"고 털어놨다.

증거도 있다. 예 실린 '미토콘드리아에 사무치다'란 작품이다. 미토콘드리아? 시인처럼 가마득한 옛날의 과학시간을 되살려야 겨우 감이 잡히는, 흔치 않은 시적 대상이자 존재다. 그러고 보니 시인은 한 해 동안 '염색체를 가지고 놀다'와 '배아' 같은 시도 썼다. 시인은 왜 별안간 생물학에 밝아졌을까.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구성물 중 하나다. 원래 박테리아였던 이것은 인간의 세포와 공생하면서 기생을 넘어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됐고 마침내 유전능력도 갖게 되었다. 어느 이른 저녁, 서울 마포의 애오개 고개를 넘을 때 말해질 수 없는 내 안의 무엇을 느꼈다. 그 무엇은 내 안으로 들어왔다가 아무 말 없이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내 안에 있는 무엇이 시를 토해냈으며, 시인은 그 무엇을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세포일 것이라고 상상했다는 얘기다. 무슨 뜻일까. 김춘식 예심위원의 해석이다. "자신의 시 창작과정을 곱씹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업이 고스란히 시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 두드러진 경향이다."

다시 시를 읽어본다. 시인이 아니라 시인의 육신을 이루는 수많은 세포 중 하나가 쓴 시를 읽어본다. 기존의 주체를 버리고 다른 주체를 끄집어냈다는 점에서 문태준 예심위원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의 지경이 감지된다"고 바라봤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시는 텅 비어 있는, 무언가 움직이는 것들 쪽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그것들이 우리 몸을 구성하는 약 100조 개의 세포마다 숨어있는 미토콘드리아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나는 아주 잠깐 사무친 것이다."

시인은 '슬프지 않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저녁처럼 또는 풀처럼 살아가기에, 세포들은 슬플 것이다. 아니 슬프다. "사무친다"란 시인의 말이 턱, 걸린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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