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1년만에 취업 면접 본 실업자에 권한 축하 위스키

중앙일보

입력 2021.06.29 11:00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26) 

손님이 적은 일요일 저녁. 양복 차림에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남자가 가게로 들어온다. 오늘 꺼내 입은 듯한 구김 없는 양복. 누군가 정성스레 다렸을 빳빳한 와이셔츠. 그렇게 날 선 그의 옷차림 속에 그는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어둡다.

그에게 물수건을 건네고 그의 주문을 기다린다. 한참 백바를 둘러보는 그지만, 쉽사리 주문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좋아하는 위스키가 있으신지요?”

“아, 네. 옛날엔 많이 마셨는데 요즘엔 통 안 마셨더니 어떤 게 맛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하나 추천해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일단 차를 한 잔 드릴 테니 드시면서 천천히 골라보시죠. 양복을 입고 계신 것을 보니 일요일에도 일을 하시나 봐요?”

“아니요, 면접을 다녀왔습니다.”

손님이 적은 일요일 저녁. 양복 차림에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그러나 날 선 옷차림 속에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어둡다. [사진 pixabay]

손님이 적은 일요일 저녁. 양복 차림에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그러나 날 선 옷차림 속에 어딘지 모르게 표정이 어둡다. [사진 pixabay]

그는 1년여 만에 양복을 입었다. 장롱 안에서 햇빛 한 번 못 보던 양복을 꺼내고, 와이셔츠를 다렸다. 넥타이도 몇 번을 고쳐 맸다. 오랜만에 매본 넥타이는 들쑥날쑥해 맘에 쏙 드는 길이가 잘 안 만들어졌다. 양복바지는 너무나 부드러웠다. 면바지나 청바지의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부드러움이 다리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만 같았다. 양복 재킷까지 걸치자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이 거울에 떠올랐다.

“이게 내가 맞나 싶을 정도였어요. 1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그 모습이었는데, 정말 지긋지긋한 모습이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얼마나 반갑던지요. 넥타이가 주는 가벼운 목의 조임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너무 덥지도 않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따뜻한 날씨에 시내에 나온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요. 옷이 더 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보다는 이렇게 단정하게 차려입고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즐거움이 더 컸어요.”

회사생활 5년 차. 그는 회사를 그만뒀다. 아니, 그만두게 만들어졌다. 직장 상사와 동료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던 그는 이대로 회사를 더 다니다간 목에 걸린 넥타이가 자기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용기 있게 회사를 그만둔 것은 좋았으나, 대책이 없었다. 처음에는 잡생각을 버리기 위해 운동에 매달렸다. 적어도 운동을 하는 순간만큼은 부정적인 생각을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밤은 언제나 찾아왔다. 어둠이 그를 움켜쥐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머리에 심었다.

밤이 두렵던 그는 애써 잤다. 저녁 7시에 잤다, 10시에 깼다. 10시 반에 잤다, 2시에 깼다. 3시에 잤다, 6시에 깼다. 그렇게 그는 긴 밤을 쪼개나갔다. 그러나 언제나 성공할 수 없었다. 아무리 쪼개려 애를 써도 쪼개지지 않을 때,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영화 '킹스맨'에서 양복을 멋지게 빼입은 콜린 퍼스가 달모어를 마시는 모습이 한때 회자됐다. 그도 면접을 보고 내 가게로 와 이 달모어 12년을 한 잔 마셨다. [사진 pixabay]

영화 '킹스맨'에서 양복을 멋지게 빼입은 콜린 퍼스가 달모어를 마시는 모습이 한때 회자됐다. 그도 면접을 보고 내 가게로 와 이 달모어 12년을 한 잔 마셨다. [사진 pixabay]

“언젠가부터 술 없이는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매일 소주 한 병씩은 마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그런 저를 보고 우셨지만, 제겐 어머니 눈물을 닦아드릴 힘이 없었어요. 밤이 오는 것만 막을 수 있었다면 저도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을 수 있었는데, 어김없이 밤은 찾아오더군요.”

그가 다시 일어서기로 마음먹은 건 사랑 때문이었다.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갔다가 처음 마주친 알바생. 그녀에게 현금을 건네주고 담배를 받아들던 그때, 그녀의 흰 손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걱정해도 꿈쩍 않던 제가, 그녀를 보는 순간 생각을 했어요. 지금 제 모습으론 그녀에게 자신 있게 다가설 수 없으니까, 멋있는 모습으로 변해야겠다고. 그러려면 우선 일부터 시작해야겠다고요. 저 참 불효자죠?”

수십 군데 이력서를 넣었지만, 나이가 차고 공백을 둔 그에게 연락이 오는 회사는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드디어 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정말 너무 기뻤어요. 그래도 아직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곳이 있었다고 하고요. 면접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면접을 본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 것 같아요. 이 회사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이걸 계기로 앞으로 기회가 찾아올 것 같기도 하고요. 집에 가려다가, 양복을 입은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여기 오니까 사회 초년생 때 처음 바에 갔던 기억이 나네요. 첫 월급을 탄 날, 바로 갔거든요. 사회인이 되면 꼭 멋진 바에 가 맛있는 위스키를 마시겠다고 생각했죠.”

달모어 12년. [사진 김대영]

달모어 12년. [사진 김대영]

백바에서 긴 뿔을 가진 사슴 로고가 새겨진 달모어 12년을 꺼낸다. 글렌캐런 잔에 담아 그에게 건네준다.

“영화 킹스맨을 보셨나요? 영화 첫 장면에 이 달모어 위스키가 나오죠. 양복을 멋지게 빼입은 콜린 퍼스가 달모어를 마시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던지요. 영화를 봤던 그 날, 저도 가게로 와서 이 달모어 12년을 한 잔 마셨습니다. 남자의 양복과 위스키는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아, 저도 그 영화 봤어요. 거기 나왔던 위스키가 이 달모어군요….”

“영화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킹스맨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시련을 겪죠. 그 고생 끝에 마신 한 잔의 위스키는 정말 맛있었을 거예요.”

“저도 언젠가 그렇게 멋진 모습으로 위스키 한 잔 마시는 날이 오겠죠?”

“멋진 삶을 사는 것 같은 킹스맨에게도 시련은 닥칩니다. 어떤 사람도 닥쳐오는 시련을 피할 수는 없죠. 그러니까 여유가 될 때, 시련과 시련 사이에 쉴 틈이 생기면 위스키를 마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셔줄 이 없는 위스키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리고 가끔, 별일 없더라도 양복을 입고 외출해보세요. 마치 킹스맨이 된 것처럼.”

위스키 인플루언서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