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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정보 누설" 스파이 공포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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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기자증을 보여 달라. 절대로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 권총으로 무장한 헤즈볼라 대원들은 단호했다. 지난달 29일 택시를 타고 들어가 본 베이루트 남부 시아파 지역. 허리춤에 권총을 찬 헤즈볼라 대원이 기자가 탄 차량을 정지시켰다. 그의 지시에 따라 택시기사는 50m 후방 초소로 차를 돌렸다. 그러자 AK-47로 무장한 두 명의 무장대원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한국 기자임을 확인한 무장대원은 "빨리 이곳을 나가라"고 채근했다. 이어 그는 기자에게 헤즈볼라 공보관에 연락하라고 이름을 써주었다. 나름대로 친절을 베푼 것이다. 하지만 공보관에 연락할 길이 없었다. 그 역시 이스라엘의 공습을 피해다니기 바쁘기 때문이다.

도시 외곽이라는 의미의 '다히야'로 불리는 이 지역을 비롯해 베이루트 주민들은 요즘 '스파이 공포증'에 떨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공군의 '족집게 폭격'때문이다. 이스라엘군은 지난달 13일 레바논을 공격한 이래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로 헤즈볼라 거점을 속속 공격하고 있다. 미제 스마트 폭탄으로 무장한 이스라엘의 F-15.F-16 전폭기는 헤즈볼라의 벙커는 물론 헤즈볼라 지도자의 이동경로, 접선장소, 무기저장고 등을 불과 몇 십㎝의 오차로 정밀 폭격하고 있다.

3주에 걸친 이스라엘의 정밀폭격은 레바논 사회에서 스파이 공포증을 유발시켰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족집게 폭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정보를 제공하는 첩자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주 레바논 주요 일간 알사피르와 알나하르는 '이스라엘 스파이' 체포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레바논 정보당국이 20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첩자들을 체포했다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베이루트 주민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 기자가 만난 한 시아파 주민은 "우리를 촬영해 보도하면 이스라엘군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이 장착된 폭탄으로 바로 공격해올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기자는 그가 보는 앞에서 사진을 지워야만 했다. 아랍어를 구사하는 것도 득이 안 된다. 길가에 앉아 기자를 지켜본 한 수니파 주민조차 "아랍어를 한다면 이스라엘의 첩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사람은 "거의 100%다"라고 거들기도 했다. 레바논 사회의 스파이 공포심은 경계를 넘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스파이'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는다.

서정민 특파원

◆ 바로잡습니다=8월 3일자 14면 '서정민 특파원 베이루트 5신'은 6신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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