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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항암치료 거부하고 자식과 여행 떠난 91세 할머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88)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유상철 전 인천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2019년 10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으니 1년 8개월 간 병상에서 투병 생활을 한 셈이다. 그는 지인들에게 잘 이겨내서 다시 운동장에 서겠다고 다짐했으나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생존율이 가장 낮은 암으로 5년 생존율은 11.4%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걸리면 죽는 암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암을 극복하더라도 그 시기만 연장할 뿐이지 인간은 언젠가 죽는 존재다.

친구가 전해준 얘기다. 이웃에 사는 부부가 나이가 들어 아이들이 출가하며 방에 여유가 생기자 각각 방을 따로 사용했다. 명분은 남편의 코골이가 심하기 때문이라지만 부부의 취향이 달라 서로 독립적인 공간을 원했다.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조식 준비를 마친 아내가 남편을 불렀는데 오지 않아 방에 가보니 남편이 숨져 있었다고 한다. 밤사이에 심정지로 세상을 뜬 것이다. 그가 각방만 쓰지 않았더라도 인기척을 느끼고 빨리 대처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가족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다.

사람들은 암으로 한동안 고통을 받다가 죽는 것을 선호할까, 아니면 심정지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선호할까. 호스피스 완화 의료를 공부할 때 이에 관한 설문 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대부분 후자를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전자를 택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환자는 막상 죽음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을 더 두려워할텐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물론 생에 애착을 갖고 전자를 선택한 환자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보다 삶을 정리하는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생을 마감할 때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인생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사진 unsplash]

생을 마감할 때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인생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사진 unsplash]

세상에 태어나서 백일이나 돌처럼 생애주기에 따라 이벤트를 하는 것처럼 삶을 마감할 때도 그런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그동안 생을 살며 신세를 진 사람들을 초청해서 간단한 소연을 한다든가, 아니면 자식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미시간주에 살던 91세 노마 할머니는 암을 진단받자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자식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병원이나 요양원에 누워서가 아니라 여행 도중 길 위에서 맞겠다는 것이다. 이 특별한 여행은 페이스북의 ‘드라이빙 미스 노마(Driving Miss Norma)’란 계정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길을 떠나며 할머니를 행복하게 만든 것은 여행 자체보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가족 품에서 맞이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이처럼 생을 마감할 때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인생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런 준비를 해야 할까. 일찍이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는 나이 40이 넘으면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 유상철 전 인천 감독이 50세에 떠났으니 그분의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나 대종사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지금처럼 길지 않았다. 그래서 연령 보정을 한다면 나이 50이나 60이 그런 시기가 아닐까 싶다.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환자의 건강 상태나 시기에 따라서 우선 순위는 다를 것이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환자라면 그의 장례방식을 미리 정해 가족에게 알려주는 것이 먼저다. 매장을 원하는지, 아니면 화장을 원하는지, 또 매장할 경우 장지는 어디로 할지 등을 정해주면 사후 가족의 고민을 덜어줄 수 있다. 재산 상속 범위도 미리 정해주는 것이 좋다. 흔히 어른의 사후 자식들이 재산을 가지고 분쟁이 벌어져 형제간 의를 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망자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생전에 상속재산에 관한 교통정리도 필요하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치료까지 원하는지 밝혀 주는 것도 필요하다. 자식들은 그동안 못한 효도를 한다고 쓸데없이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매달리기 쉬운데, 자칫하면 막바지에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어디서 임종을 맞이하고 싶은지도 중요하다. 집에서 맞이할지, 병원에서 맞이할지 그가 원하는 바를 알려주는 것이다.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싶은데 가족을 배려해 마지 못해 병원에서 임종하겠다는 환자도 있다. 그러므로 자식들이 어른의 마음을 잘 살펴 마지막 가는 길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노력할 일이다.

임종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람을 초청해 서로 이별을 나누는 것도 권한다. 평소 관계가 좋지 못했던 사람과 화해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이벤트를 통해 환자가 마음의 안정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전 장례식을 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사실 사후 장례식은 유족을 위한 것이지 사자와는 상관없는 행사다. 생전 장례식은 환자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시간이 된다.

남아 있을 가족에게 글을 쓸 수도 있다. 광주에 사는 70대 할머니는 암으로 투병 중에 자식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 물려 배부르면 나를 바라본 눈길에 참 행복했다네…. 병들어 하느님 부르실 때 곱게 갈 수 있게 곁에 있어 줘서 참말로 고마워.” 할머니를 떠나보낸 가족에겐 그 글이 큰 위로가 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세상을 떠나면서도 살아있는 사람을 배려할 수 있다.

우리가 평소 죽음을 준비해두는 것은 염세적인 자세가 아니라 남아있는 삶을 잘 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죽음 공부는 바로 삶의 공부라 할 수 있다. [사진 pixabay]

우리가 평소 죽음을 준비해두는 것은 염세적인 자세가 아니라 남아있는 삶을 잘 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죽음 공부는 바로 삶의 공부라 할 수 있다. [사진 pixabay]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오르면 모두 하느님과 만난다는 시가 있다. 어느 사람이 하늘에 올라 입구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니 하느님이 가운데 앉아 있고 먼저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무슨 얘기를 묻는지 엿들으니 내가 준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슬그머니 빠져나와 뒷줄로 가 섰다. 마침내 그밖에 없었을 때 하느님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준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그는 울상이 되어 “하느님 저는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고 답했다.

인생 2막은 바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호스피스 간호사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생전에 의미 있는 일을 했던 사람이 비교적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생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하늘에 올랐을 때 하느님과 나눌 얘기를 염두에 두고 준비하는 것도 좋겠다.

티베트 불교에 의하면 임종의 순간에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그의 내세가 결정된다는 설도 있다. 과연 죽음 이후의 생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죽는 순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우리가 평소 죽음을 준비해두는 것은 염세적인 자세가 아니라 남아있는 삶을 잘 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죽음 공부는 바로 삶의 공부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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