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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인생학교 제자를 배우로 쓰는 군인 출신 다큐 감독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87)

아침에 조간을 펴니 1990년 전후 올림픽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노진수 선수의 인생 2막이 소개되었다. 그는 배구선수를 그만두고 지도자로 변해 성균관대 감독, LG화재 감독을 역임한 후 경북 영천 시골로 내려가 그곳에 있는 중학교의 체육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명문 배구팀의 감독이 시골로 오자 사람들은 머지않아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7년째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열심이다. 기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경북 영천의 한 중학교에서 7년째 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올림픽 배구국가대표 출신 노진수 선수. [중앙포토]

경북 영천의 한 중학교에서 7년째 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올림픽 배구국가대표 출신 노진수 선수. [중앙포토]

대학을 졸업하고 비교적 보수가 좋다는 금융회사에 취업했는데 다니다 보니 금융회사의 일이 너무 단순하고 별로 보람도 느끼지 못했다. 중간에 회사를 떠나는 동료직원을 바라보며 나도 되돌아갈 것인가, 그대로 갈 것인가 고민했다. 어느 날 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는 보수는 적더라도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나름 보람을 느낄 것 같았다.

그러나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교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대학 다닐 때 교직 과목을 이수할 수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교사는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나 역시 그때는 관심이 없어 교직 과목을 신청하지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 아쉬움이 컸다. 교육대학원에 입학하면 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노크했지만 그곳은 주로 현직교사를 재교육시키는 곳이었다.

정작 교사가 될 수 있는 찬스는 은퇴 후에나 왔다. 스스로 시민들과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길어지며 먼저 유럽에서 지자체나 시민들이 주도하여 평생학습기관을 열었는데 나도 영국의 시니어 대학 U3A(University of the 3rd Age)를 벤치마킹해 2013년 분당에 인생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위례신도시에도 인생학교를 개교했다. 이곳에서는 강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강사와 학생이 함께 수업을 이끌어가는 쌍방향으로 운영하므로 해당 과목에 관심과 열정이 있으면 누구나 강사가 될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이 강사가 되었다. 강사 중에는 해당 분야를 전공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학교에서 전공하지 않았지만 뒤늦게 공부해 그 분야에 일가견을 이룬 사람이다. 오히려 전공자보다 더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도 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나도 특별히 경제학을 공부한 비전공자에 비해 깊은 지식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할 땐 그 분야에 얼마나 열정을 갖고 노력했느냐에 달린 것이지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지식과 지혜를 나누는 인생학교에서 많은 시민이 강사가 되었다. 인생을 살며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나눈다. 그 분야에 얼마나 열정을 갖고 노력했느냐에 달린 것이지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사진 pxhere]

지식과 지혜를 나누는 인생학교에서 많은 시민이 강사가 되었다. 인생을 살며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나눈다. 그 분야에 얼마나 열정을 갖고 노력했느냐에 달린 것이지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사진 pxhere]

어느 강사는 대학에서 가정학을 공부하고 결혼해 육아에만 전념하다가 뒤늦게 화가로 변신했다. 이름만 대만 알만한 유명 화랑의 전속 화가이며 해외 아트페어에서도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와 얘기를 나누어보면 얼마나 미술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지 미술을 일찍 접한 나로서도 놀라워할 때가 많다. 영문학을 전공한 후 동시통역사와 외화 번역가로 일하다가 화가가 된 강사도 있다. 그를 소개할 때 어느 영화를 번역한 작가라고 하면 이제 지나간 일이라며 손사래를 치곤 했다.

육사를 졸업하고 직업 군인으로 군문에 있다가 제대한 강사도 있다. 그는 뒤늦게 다큐멘터리 영화에 입문해 벌써 여러 편의 단편 영화를 제작하였다. 최근에는 어떻게 존엄한 노후를 맞이할 것인가란 주제의 시나리오를 구상 중이다. 그에게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직접 그의 영화에 출연하기도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스승과 제자의 정이 돈독하게 맺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의학을 전공한 강사는 의사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진료에 관한 팁을 전해준다. 많은 사람이 병원에 가면 주눅이 드는데 그의 강의를 들어보면 치료도 환자가 중심이 되어 스스로 의학지식을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금융회사에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금융투자를 가르치고 있다. 내가 현업에서 습득한 지식을 시민들 대부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얘기를 나누어보니 금융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했다. 과거 학교 교과과정에서 금융교육을 받은 바가 없기 때문이다.

교사가 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어도 시니어들은 인생을 살며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이 누구나 있다. 그들은 그런 지식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한다. 이런 염원을 체계화하면 정규 교육 못지 않은 양질의 실용 강좌를 여러 개 개설할 수 있다. 비근한 예로 독일 뮌헨시민대학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강사로 참여하는데 그 수가 3000명이라 한다.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시민들끼리 서로 지식과 지혜를 나누는 인생학교가 지역 곳곳에 움틀 것으로 믿는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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