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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텅 빈 경로당…대안은 지역 주민 위한 ‘인생학교’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85) 

19세기 말 마흔도 안 됐던 인간 수명이 20세기 들어 급격히 늘더니 1970년대 70세를 넘어섰다. 수명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은퇴 후에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프랑스에서는 현업에서 물러난 사람을 재교육해 후반생애에서 그들이 다시 한번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지자체, 대학 등이 중심이 되어 은퇴자를 위한 대학 ‘U3A(University of the 3rd Age)’를 설립했다.

은퇴 후 가장의 역할과 육아의 부담에서 벗어난 시니어가 평소 관심을 가졌던 분야에 대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러한 재교육 움직임은 인근 국가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에서 출발한 U3A 운동은 1980년대 영국으로 건너가며 학교를 운영하는 주체가 지자체에서 시민으로 바뀌었다. 영국에서는 시민 스스로가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을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으로 발전하며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현재 영국에는 40만 명이 넘는 회원이 1000여 개의 지역 U3A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전 노령세대는 퇴진하고 새로운 세대는 외면해 경로당이 공동화하고 있다. 경로당 문화도 시대의 조류에 따라 바꾸어야 한다. [사진 unsplash]

이전 노령세대는 퇴진하고 새로운 세대는 외면해 경로당이 공동화하고 있다. 경로당 문화도 시대의 조류에 따라 바꾸어야 한다. [사진 unsplash]

2010년 뉴스를 통해 영국 U3A의 존재를 알게 된 나는 우리 사회에도 꼭 필요한 커뮤니티라고 생각했다. 마침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주관해 은퇴 후 후반생 설계에 관한 에세이를 공모하고 있었는데 나의 이런 계획을 적어 응모했더니 그들의 취지에 부합했는지 대상에 선정되었다. 2013년 3월 이웃들을 모아 분당에 작은 공간을 빌려 영국의 U3A를 벤치마킹한 아름다운인생학교를 개교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KBS TV 뉴스제작팀에서 어떻게 알고 학교를 찾아왔다. 다음날 KBS TV 오후 9시 뉴스에 학교 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졌다. 그 후에도 여러 언론사에서 방문해 우리 학교를 취재했다.

미디어를 통해 학교의 존재가 알려지자 지자체, 교회, 비영리단체, 그리고 시민들이 찾아왔고 멀리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나라도 영국처럼 조만간 지역 곳곳에 시니어를 위한 학교가 열리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막상 개교한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도 지자체나 기관 등에서 시작했을 뿐이다. 우리 학교를 방문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보니 공간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애로 사항을 털어놓는다.

사실 우리 주변에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역 이기주의 등으로 그것을 이용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학령 아동의 감소로 초등학교의 교실이 남아돌고, 지방의 대학은 벚꽃 피는 순서로 문을 닫는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아파트 단지마다 커뮤니티 공간, 작은 도서관, 그리고 경로당 등이 있으나 단지 내 주민만 이용할 수 있고 외부 사람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교회 등 종교기관도 마찬가지다. 지자체나 공공도서관도 공간이 있으나 시민들이 고정적으로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하루는 문체부 산하 국립중앙도서관 스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번 만나서 성인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와 만나 우리나라 시니어의 평생교육 제도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는 도서관 내에 아름다운인생학교 분교를 시범적으로 운영해보면 어떠하겠냐고 제안했다. 도서관 회원은 기본적으로 학습 의욕이 높고, 중앙도서관에 인생학교가 개설되면 지역도서관에도 같은 커뮤니티를 오픈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우리는 몇 차례 더 만나 상의한 끝에 2020년 3월 국립중앙도서관에 분교를 개설하기로 합의하고 공간과 강의 시간표를 확정했다. 그런데 개설 한 달 전 우리 사회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졌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폐렴이 우리나라까지 들어온 것이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가 아니라 우한 폐렴으로 불렀다. 우리는 부득이 봄에 개강하기로 했던 강좌를 3개월 연기해 여름학기에 오픈하기로 일정을 조정했다.

그런데 코로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감염 환자가 늘어났다. 할 수 없이 여름학기 개강을 다시 3개월 늦추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담당 스텝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자리를 옮겼다. 물론 후임자와 업무 인계인수가 이루어졌을 테지만 참으로 아쉬웠다. 당시 예정대로 강좌가 개설되었더라면 지금쯤 지역 도서관 몇 개도 오픈했을지 모를 일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은퇴를 시작한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이제는 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이들은 과거의 기성세대와는 다르다. 이전 세대는 먹고사느라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는데, 베이비붐 세대는 교육수준도 높고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도 있다. 이들에게 경로당에 가라고 하면 모두 손사래를 친다. 경로당의 문제는 시설만 있지 소프트웨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전 노령세대는 퇴진하고 새로운 세대는 외면해 경로당이 공동화하고 있다. 경로당 문화도 이제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바꾸어야 한다.

최근 주목받는 기업의 ESG 경영에서 인생학교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지자체나 교회,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여유 공간을 할애한다면 곳곳에 인생학교를 개설할 수 있다. [사진 unsplash]

최근 주목받는 기업의 ESG 경영에서 인생학교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지자체나 교회, 기업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여유 공간을 할애한다면 곳곳에 인생학교를 개설할 수 있다. [사진 unsplash]

어느 날 우연히 지역구 국회의원을 만났다. 덕담을 나눈 후 그에게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좋은 팁을 하나 주겠다고 제안했다. 경로당을 인생학교로 전환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것이다. 현재 전국에는 6만여 개의 경로당이 있다. 이 중 1%만 인생학교로 전환해도 전국에 600개의 시니어를 위한 커뮤니티가 별도 예산 없이 탄생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노인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이 모여 서로의 지혜를 나눌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 간에 담을 허물고 서로 머리를 모아 협력할 필요가 있다.

여기 좋은 사례가 있다. 경기 화성시 동탄2신도시 중앙초등학교에 가면 ‘동탄중앙이음터’라는 복합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경기도교육청이 부지를 제공하고, 화성시가 돈을 들여 지은 것으로 학생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다. 건물 1층에는 시립어린이집과 마을 카페가 있고, 2층에는 주민이 이용하는 교실과 공동육아 공간, 3~4층엔 어린이자료실과 도서관이 있다. 5층에는 요리 스튜디오 등을 갖춰 지역 주민과 학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경로당이나 도서관도 고유 목적과 함께 국립중앙도서관 스텝처럼 지역 주민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을지 고민했으면 좋겠다. 나아가 지자체, 교회, 기업도 사회공헌 차원에서 여유 공간을 시민에게 할애해 준다면 우리도 영국처럼 지역 곳곳에 인생학교를 개설할 수 있다. 최근 기업들이 글로벌경영의 화두로 주목받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어우르는 ESG 경영을 강화하고 있는데, 인생학교가 그 대안의 하나가 될 수 있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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