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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쇼핑·미용실, 강남은 뻔해…복고·개성 ‘강북스타일’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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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성수엔 구석구석 개성 넘치는 곳들이 많아요. 공장을 개조한 카페에서 나오면 맞은편에 프랑스 밤잼을 파는 가게가 있고 그 앞으로 오래된 리어카가 지나가요. 서울숲과 한강 변이 가까워 러닝족들이 뛰어가고 손에 핸드백 대신 돗자리를 든 사람들 구경도 재밌어요.”  
친구들과 종종 서울 성동구 성수역을 찾는다는 김연수(36·혜화동) 씨는 “골목길이 많아 주차는 어렵지만 도보로 즐기는 서울 여행 같은 느낌”이라고 매력을 요약했다.

서울 성수동의 베이커리카페 '어니언'의 모습. 1970년대 지어진 공장을 한옥느낌으로 개조했다. 중앙포토

서울 성수동의 베이커리카페 '어니언'의 모습. 1970년대 지어진 공장을 한옥느낌으로 개조했다. 중앙포토

강남엔 유명 명품 브랜드 많지만…

패션과 유행의 중심축이 서울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동하고 있다. 강남은 소득수준이 높고 압구정·청담·가로수길 곳곳에 샤넬·루이비통·에르메스·프라다·버버리 등 명품 브랜드 매장이 즐비한 국내 최고의 소비지역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비나 생활양식을 이끄는 원동력, 즉 ‘트렌드’의 주도권은 성수(성동구)·한남(용산구)·합정(마포구)·을지로(중구) 등 강북 지역으로 넘어오는 양상이 뚜렷하다.

최근 1년간 온라인상 언급량 분석 #가로수길 13% 줄고 성수동 3% 늘어 #공장 개조한 카페·레트로숍 등 인기 #무신사 등 패션기업도 성수동 집결 #전문가 “경제 아닌 문화자본의 이동”

트렌드 1번지, 강남에서 강북으로.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트렌드 1번지, 강남에서 강북으로.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중앙일보는 빅데이터 분석기업인 ‘타파크로스’와 함께 강남을 대표하는 ‘가로수길’과 강북을 대표하는 ‘성수동’이 최근 1년간 온라인상에서 얼마나, 어떻게 언급됐는지 분석해 봤다. 트위터·인스타그램·블로그·커뮤니티 등 소비자 발신 전체 채널에서 데이터를 뽑았다.

코로나에도 활기띄는 성수의 힘

가로수길 VS 성수동.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가로수길 VS 성수동.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 결과 가로수길은 언급량이 37만6520건으로 전년 대비 13.2% 줄어든 반면, 성수동은 48만9762건으로 같은 기간 2.9% 증가했다. 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성수동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

주요 업종별 언급량 변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주요 업종별 언급량 변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지역 상권을 구성하는 업종 언급량도 가로수길은 ▶음식점·주점(-11.7%) ▶베이커리·카페(-33.7%) ▶패션(-22.3%) 등 대부분 크게 감소했다. 성수동 역시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패션이 18.2% 감소했지만 음식점·주점, 팝업·쇼룸·전시 언급량이 각각 30% 이상 급증하고 베이커리·카페도 1.9% 하락에 그치는 등 활발한 상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쇼핑 VS 아기자기한 구경

흥미로운 건 두 지역의 이미지, 인상의 차이다. 사람들이 두 지역에 대해 쓴 형용사들을 모아 분석해보니 가로수길은 ‘전문적인’ ‘고급스러운’ ‘세련된’ ‘큼직한’ ‘유명한’ 등이 주로 언급됐다. 이에 비해 성수동은 ‘유니크한’ ‘낡은’ ‘아기자기한’ ‘색다른’ 등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느낌이 많았다.

지역별 키워드 톱10.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지역별 키워드 톱10.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방문한 목적을 짐작할 수 있는 연관 핵심어도 가로수길은 쇼핑·미용실·네일(손톱) 등이 상위에 올랐고, 성수동은 데이트·파티·브런치·구경 등이 두드러졌다.

정혜지 타파크로스 선임연구원은 “가로수길이 쇼핑·미용실 등 뚜렷한 목적을 위한 곳이라면 성수는 사람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는 특징을 지닌다”며 “공장이나 주택을 개조한 레트로(복고)풍 가게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체험형 매장들이 성수의 소구 포인트가 됐다”고 설명했다.

K팝·명품 기업도 강북으로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가 서울 용산 신사옥에 마련한 복합문화공간 '하이브 인사이트' 모습. 사진 하이브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가 서울 용산 신사옥에 마련한 복합문화공간 '하이브 인사이트' 모습. 사진 하이브

강북의 부상은 기업들의 최근 발자국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무신사·젠틀몬스터·아더에러 등 화제의 패션 기업들이 성수동으로 집결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도 마찬가지다. SM은 압구정·청담동에 있던 사옥을 정리해 서울숲 옆의 아크로서울포레스트 D타워로 옮긴다.
BTS(방탄소년단)의 소속사인 하이브도 새로운 복합 문화 기지를 만들겠다며 지난 3월 사옥을 강남 대치동에서 용산으로 이전했다. K팝을 키운 주역들의 ‘탈강남’이다. 올 하반기 기업공개(IPO) 최대어로 꼽히는 게임기업 크래프톤 역시 성수동에 신사옥을 준비 중이다.

급기야 좀처럼 강남 밖으로 나서지 않던 명품 브랜드인 구찌가 최근 용산구 한남동에 ‘구찌가옥(家屋)’이란 대표 매장을 냈다. 한강진역에서 이태원역으로 이어지는 일명 ‘꼼데길’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문을 연 '구찌가옥(GUCCI GAOK)' 내부 모습. 구찌가 강북 지역 최초로 선보이는 대표매장으로, 한국 전통 주택을 의미하는 '가옥(家屋)'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문을 연 '구찌가옥(GUCCI GAOK)' 내부 모습. 구찌가 강북 지역 최초로 선보이는 대표매장으로, 한국 전통 주택을 의미하는 '가옥(家屋)'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연합뉴스

한강진역부터 이태원 제일기획까지 좁은 도로를 끼고 패션 거리가 형성돼 있다. 제일 먼저 매장을 낸 꼼데가르송의 이름을 따 '꼼데길'로 불린다. 최근엔 명품 브랜드 구찌까지 가세해 강북 패션 1번지로 부상했다. 중앙포토

한강진역부터 이태원 제일기획까지 좁은 도로를 끼고 패션 거리가 형성돼 있다. 제일 먼저 매장을 낸 꼼데가르송의 이름을 따 '꼼데길'로 불린다. 최근엔 명품 브랜드 구찌까지 가세해 강북 패션 1번지로 부상했다. 중앙포토

패션브랜드 꼼데가르송이 들어서며 별칭이 붙은 이 길엔 ‘띠어리’ ‘비이커’ ‘구호’ 등 삼성물산 브랜드와 ‘코오롱스포츠’, 스웨덴 패션브랜드 ‘코스(cos)’, 글로벌 뷰티 브랜드 ‘이솝’ ‘꼬달리’ ‘조말론’ ‘르라보’ 등의 매장이 모여 있다. 패션 업계 관계자는 “청담동이 명품 거리라면 한남동은 트렌드 선구자들이 먼저 알아보는 브랜드들이 들어온다”며 “이번 구찌 입성으로 명품 브랜드들의 (한남동) 깃발꼽기가 시작될 거란 얘기가 많다”고 전했다.

온라인 쇼핑 시대, 상권 핵심은 경험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동하는 건 ‘경제 자본’이 아닌 ‘문화 자본’이다. 서울의 도시 공간을 연구하는 이기웅 성공회대 교수는 “강남은 부유하다는 이미지는 있지만 문화적인 매력이 떨어진다. 남들과 다른 취향을 쫓고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의 취향이 강북으로 이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성수역 인근 골목에 있는 '피치스 도원' 내부 모습. 자동차를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인기 도넛과 햄버거 매장이 함께 있다. 이소아 기자

서울 성수역 인근 골목에 있는 '피치스 도원' 내부 모습. 자동차를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인기 도넛과 햄버거 매장이 함께 있다. 이소아 기자

삼성물산에서 상권을 분석하는 유통혁신팀 박태준 그룹장은 “온라인 쇼핑이 일상화하면서 오프라인 매장은 구매 자체보다는 경험하고 즐기는 매장이어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 천편일률적 구조의 건물이 많은 강남은 재미가 없다. 오래된 주택 등 옛것이 남아있는 강북이 더 유리하다”고 분석했다. 또 “인스타그램 등 SNS(소셜미디어)에 사진을 공유하는 트렌드 덕에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사이에서 강북지역에 대한 선호가 크게 커졌다”고 덧붙였다.

“강남 지역문화 전성기 지나”  

강북 상권을 주도하는 먹거리는 다른 업종과 쉽게 연결돼 다양한 색채를 만들어 내는 데 한몫했다. 먹고 마시다가 전시회를 보고 굿즈(상품)를 산 뒤 집안을 꾸미는 인테리어 숍에 들르는 식이다. 상권을 패션이 주도하는 강남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골목길 자본론』의 저자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강남은 대기업이나 스타트업들이 사무실을 두는 등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도시문화’ 차원에서는 전성기가 끝난 지 오래”라고 말했다. 모 교수는 “패션이나 연예 기획사 등 문화·창조 산업이 강북으로 넘어갔다는 게 곧 트렌드가 넘어갔다는 것”이라며 “저성장 시대엔 도시문화, 지역 문화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결국 문화·창조 산업들이 향하는 지역에 오프라인의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소아·유지연·배정원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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