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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가 성인돼 만든 상권” 성수·한남, 강남 안부러운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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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경리단길과 가로수길, 연남동과 삼청동, 을지로와 서촌…. 서울은 이미 여러 번의 ‘뜨는 동네’를 가진 경험이 있다. 강남역과 명동 등 거대 상권이 아닌, 작은 골목을 중심으로 말 그대로 ‘동네’가 뜨는 게 요즘 패턴이다.

지난해 성수동 서울숲 앞 골목에 문을 연 패션 브랜드 '아카이브 앱크'의 쇼룸. 단독주택을 개조해 특유의 멋을 풍긴다. 사진 아카이브 앱크

지난해 성수동 서울숲 앞 골목에 문을 연 패션 브랜드 '아카이브 앱크'의 쇼룸. 단독주택을 개조해 특유의 멋을 풍긴다. 사진 아카이브 앱크

골목은 혁신가를 모은다 

네모반듯한 신축 건물에 입점한 매장보다 구불구불 골목길 사이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 만든 가게들은 이질적이면서도 색다른 매력을 풍긴다. 이런 지역에 소규모 갤러리와 라이프스타일 매장, 특색 있는 카페·레스토랑 등 트렌드를 선도하는 이른바 ‘혁신가’들이 자리를 잡으면 취향과 안목이 있는 젊은이들이 뒤따르면서 특색 있는 상권이 형성된다. 널찍한 대로변 상권의 강남보다, 골목골목 언덕배기 오래된 것과 현재의 것이 공존하는 강북이 뜨는 배경이다.

혁신가들 몰리며 독특한 상권 형성 #“성수동, 땅 넓어 진입 여지 많은 편”

성수동의 초기 부흥을 이끈 카페 어니언. 오래된 금속 공장을 개조해 만들었다. 중앙포토

성수동의 초기 부흥을 이끈 카페 어니언. 오래된 금속 공장을 개조해 만들었다. 중앙포토

뜨는 동네가 지는 이유

물론 이런 뜨는 동네도 흥망성쇠가 있다. 사실 한남과 성수의 부상은 기존 트렌드 발신지였던 강남의 부침과 관련이 있다. 강남 트렌드를 선도하던 신사동 가로수길은 ‘핫플레이스’로 입소문이 나면서 임대료가 상승했고, 자본력을 앞세운 대기업 브랜드가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매력이 퇴색했다. 가로수길만의 문화와 분위기를 만들어왔던 카페와 레스토랑 등 식음료 사업자, 작은 갤러리나 라이프스타일 매장을 운영하던 혁신가들은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남·성수 등지로 이동했다.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 현상이다.

임대료가 높아지면 자본력이 있는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길거리를 점령한다. 사진은 가로수길 전경. 중앙포토

임대료가 높아지면 자본력이 있는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길거리를 점령한다. 사진은 가로수길 전경. 중앙포토

강남의 임대료는 여전히 서울 최고 수준이다. 상가정보연구소에 따르면 가로수길이 있는 신사역 인근 상가 임대료는 올해 1분기 기준 ㎡당 8만2000원, 강남대로는 10만3000원에 달해 강북에서 가장 높은 홍대·합정 7만원을 압도한다. 다만 임대료 추세는 강남이 떨어지고 강북은 오르고 있다.

서울 중대형 상가 임대료, 강남은 하락세.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서울 중대형 상가 임대료, 강남은 하락세.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근무하는 유모(32)씨는 “땅값이 비싼 강남을 피해 성수동으로 왔지만 이 곳 카페거리도 임대료 뿐 아니라 권리금도 억대로 치솟아 작은 카페 하나를 차리려 해도 2억원은 잡아야 한다”며 “지금 핫한 지역은 꿈도 못 꾸는게 젊은 사업가들의 숙명같다”고 말했다.

서울 중대형 상가 임대료, 강북은 상승세.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서울 중대형 상가 임대료, 강북은 상승세.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성수·한남도 반짝인기로 끝날까 

젠트리피케이션 연구 전문가인 이기웅 성공회대 교수는 “지난 1년 반은 코로나19로 상권이 침체돼 젠트리피케이션이 확산하지 않았지만 이르면 연말, 늦어도 내년부터는 뜨는 동네와 지는 동네의 차이가 더 명확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뜨는 동네의 조건으로 ▶확장성 ▶접근성 ▶배후수요를 꼽는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커피 전문점 '블루보틀'은 한국 상륙 1호점으로 성수동을 선택했다. 중앙포토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커피 전문점 '블루보틀'은 한국 상륙 1호점으로 성수동을 선택했다. 중앙포토

성수와 한남은 어떨까. 두 지역은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처럼 상권이 하나의 중심 도로에 형성된 게 아니라 넓은 지역에 퍼져 ‘확장성’ 을 갖기 때문에 임대료 인상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성수동에서 임대형 팝업 매장 ‘프로젝트 렌트’를 운영하는 최원석 필라멘트엔코 대표는 “중심 상권에 자본가들이 몰리더라도 그 주변으로 혁신가들이 공존할 수 있으면 거리의 매력이 유지된다”며 “특히 성수동은 땅이 넓어 아직도 진입할 여지가 많은 편”이라고 했다.

한남동과 성수동은 모두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고급 주거단지로 탈바꿈하면서 배후 수요가 풍부해 자생적 소비문화지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사진은 한남동 나인원한남에 입점한 가나 아트 갤러리. 중앙포토

한남동과 성수동은 모두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고급 주거단지로 탈바꿈하면서 배후 수요가 풍부해 자생적 소비문화지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사진은 한남동 나인원한남에 입점한 가나 아트 갤러리. 중앙포토

소비력이 있는 강남과의 ‘접근성’도 좋다. 성수는 압구정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 한남동은 한남대교 북단과 바로 맞닿아 있다. ‘배후수요’는 자생력의 필수조건이다. 두 지역 모두 재개발을 앞두고 고급 주거 단지로 탈바꿈할 예정으로 자체 소비 여력이 풍부하다. 삼청동 등 떴다가 진 동네가 외지인의 소비에 의존했다면 성수와 한남은 대형 오피스와 고급 주거라는 상주인구가 생겨 자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강북에서 ‘혁신가들이 만드는 골목 산업’이 생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구체적으론 생산과 소비가 함께 이루어지며 패션·트렌드·라이스프타일 업종이 고루 선순환하는 자생적 소비문화지대다.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MZ세대가 성인이 돼 골목 상권을 만들기 시작한 게 2000년대 초반부터였고 점점 더 발전하는 중”이라며 “이들이 추구하던 ‘나 다움’이 동네다움·지역다움으로 진화하면서 유럽 등 많은 선진국처럼 지역 위주의 골목 산업이 자생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유지연·배정원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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