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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에 끊어준 ‘대만해협 어음’ 만기…G7행 文, 발걸음 무겁다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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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각기 다른 한ㆍ미 공동성명 ‘번역기’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오후(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일 오후(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정상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1일 한ㆍ미 정상회담 뒤 도출한 공동성명에서 정부가 가장 큰 성과로 꼽는 건 두 문장이다.
“우리(한ㆍ미 정상)는 2018년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공동성명 등 기존의 남북 간, 북ㆍ미 간 약속에 기초한 외교와 대화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라는 공동의 믿음을 재확인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남북 대화와 관여, 협력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문재인 정부의 ‘평화 히트 상품’인 판문점 선언이 포함된 데다 한ㆍ미 간 대북 접근법을 두고 차이가 두드러질 수 있다는 우려를 ‘바이든 대통령’을 주어로 하는 문장 삽입으로 깨끗하게 해소했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 앞에서 '4.27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오후 판문점 평화의 집 앞에서 '4.27 판문점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최근 정부·여당이 내는 메시지를 보면 이것을 성과를 넘어 ‘만능의 보검’처럼 여기는 분위기다.
“한ㆍ미 정상회담 결과를 토대로 남북 관계의 조기 복원을 위한 대화 재개와 교류 확대가 필요하다는 데 (당정이)인식을 같이했다”(5월 28일 고위당·정·청 협의회 뒤 고용진 민주당 수석대변인)며 판문점 선언을 조기에 비준하겠다고 하더니,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남북대화 지지를 표명한 만큼, 그동안 멈춰 서있던남북의 시계를 다시 움직여 우리의 역할과 남북 간 협력의 공간을 확보해나가려고 한다”(9일 국회 협의)고 말했다.

그동안 판문점 선언 비준이나 남북 협력이 미국이 반대해서 안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판문점 선언 비준 동의안이 처리되지 않은 것은 여야 간 공감대 부족 때문이었고, 남북 대화 단절은 2019년 하노이 노 딜의 충격과 코로나19 등으로 인해 북한이 자발적 고립을 택한 탓이 크다.

지난 4월 미 해군 맥케인함이 대만해협 내 국제 수역을 지났다고 밝히면서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미 태평양 함대

지난 4월 미 해군 맥케인함이 대만해협 내 국제 수역을 지났다고 밝히면서 관련 사진을 공개했다. 미 태평양 함대

반면 미국이 ‘만능의 보검’으로 활용하려는 건 공동성명의 다른 두 문장이다.
우리(한ㆍ미 정상)는 남중국해 및 여타 지역에서 평화와 안정, 합법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상업 및 항행, 상공비행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법 존중을 유지하기로 약속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대만 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ㆍ미 공동성명에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이 포함된 데 대해 정부는 “원론적 입장 표명”이라고 설명했지만, 정상 간에 ‘약속’이라는 표현까지 쓴 이상 그렇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양국 모두 알고 있다. 
특히 미국은 그동안 미ㆍ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온 한국을 미국 쪽으로 견인한 점을 이번 정상회담의 큰 성과로 보고 있다.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 대해 언급한 두 문장을, 미국은 한국이 다시는 멀어지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놓는 닻처럼 여기는 분위기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2월 백악관에서 반도체·전기차배터리·희토류 등 주요 물자의 공급망 점검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 전 반도체 칩을 들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2월 백악관에서 반도체·전기차배터리·희토류 등 주요 물자의 공급망 점검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 전 반도체 칩을 들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공교롭게도 바이든 대통령의 코로나19 기원 추가 조사지시, 대만에 대한 백신 지원, 대만과의 통상회담 재개 추진 등 중국을 겨냥한 일련의 조치들이 한ㆍ미 정상회담 직후부터 숨 가쁘게 이뤄지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한ㆍ미 정상회담에 앞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먼저 만난 것까지 고려하면, 마치 미국이 동북아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한국, 일본과 먼저 연합전선을 구축한 뒤 중국 때리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모양새다.

특히 9일(현지시간) 공개된 미국의 공급망 회복 등에 관한 전략 보고서에는 ‘한국’이 74차례, ‘삼성’이 35차례나 등장했다. 미국은 중국이 그간 글로벌 공급망 질서를 교란해왔다고 보고, 미국 중심의 새로운 공급망 규범을 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한 기본 원칙을 제시한 보고서에서 한국의 반도체 등 관련 산업 동향을 이처럼 비중 있게 다룬 건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의 ‘말’은 얻어냈으니 이제 ‘행동’을 요구하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및 오스트리아·스페인 국빈방문을 위해 출국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1일 오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의 환송을 받으며 공군 1호기로 향하고 있다. 뉴스1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및 오스트리아·스페인 국빈방문을 위해 출국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1일 오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의 환송을 받으며 공군 1호기로 향하고 있다. 뉴스1

한국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11~13일 영국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에 대응할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G7 회원국은 아니지만 공식 초청을 받았고, 문 대통령도 해당 회의에 참석한다. G7 회원국들은 물론이고 또 다른 초청국인 호주, 인도 등도 대중 견제와 관련해 이미 공감대를 형성한 점 등을 고려하면 그간 미ㆍ중 사이에서 ‘약한 고리’로 인식돼온 한국의 정상은 어떤 입장인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서로 각기 유리한 방향으로 공동성명을 활용하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결국 ‘어음’ 결제 만기일은 한국에 더 빨리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촘촘하게 대중 견제망을 짜며 그때마다 한국의 행동을 요구하겠지만, 한국으로선 남북 관계 촉진을 위해 미국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싶어도 북한의 호응이란 전제가 우선 성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남북관계 지지 어음’을 끊어놓고 사태를 관망하면 되는 셈이다.

9일(현지시간) G7 정상회의가 열리는 영국 콘월의 한 ,가게에 7개국 국기가 걸려 있다. AP=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G7 정상회의가 열리는 영국 콘월의 한 ,가게에 7개국 국기가 걸려 있다. AP=연합뉴스

공교롭게도 미국의 공급망 보고서가 공개된 직후인 9일 밤 이뤄진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의 통화에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미ㆍ중 간 협력이 국제사회의 이익에 부합하는 만큼 미ㆍ중 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아름다운 국제질서는 현 상황과는 거리가 멀고, 한국은 당장 미ㆍ중 대결이 만들어낼 정글에서 어떻게 생존할지 답을 내놔야 한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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