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시론

낙태법 6개월 방치한 국회·정부의 직무유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최안나 대한산부인과학회·낙태법특별위원회 간사

최안나 대한산부인과학회·낙태법특별위원회 간사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269조 1항과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촉탁을 받아 낙태하는 경우를 처벌하는 형법 270조 1항의 ‘의사’에 관한 부분을 헌법 불합치로 결정했다. 당시 헌재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입법자가 태아의 생명 보호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실현을 최적화할 수 있는 개선 입법을 이행하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시한 내에 낙태법이 개정되지 않아 관련 형법 조항들이 효력을 상실한 지 6개월이 지났다.

불법 낙태약 SNS 판매 위험 수위 #여성·태아 안전 방치하지 말아야

즉 여성과 의사는 모자보건법의 허용 한계를 벗어나 낙태해도 형법으로 처벌받지 않는다. 그런데 269조 2항의 ‘일반인’에 의한 낙태 조력도 형벌 규정인 1항의 효력이 상실돼 부작용이 적지 않다. 예컨대 무자격자가 낙태약을 ‘흔적 없이 깨끗하게 해주는 자연유산 유도약’이라 선전하는 온라인 불법 판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낙태죄로는 처벌할 수 없다. 이로 인해 태아와 여성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요즘 SNS에는 낙태약 판매를 24시간 상담하는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2020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낙태약의 불법 온라인 판매는 2015년 12건에서 2019년 2365건으로 200배 가까이 폭증했다. 적발된 건수가 이 정도이니 실제 불법 유통되는 약은 훨씬 많을 것이다.

이런 약으로 집에서 낙태를 시도했지만 살아서 태어난 아기를 변기에 빠뜨려 사망하게 한 뒤 사체를 유기한 부모들이 2020년에 영아살해 및 사체유기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올해 항소심에서는 연달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있다. 지난 4월에는 SNS로 불법 낙태약을 사 먹고 자신이 낳은 아기 시신을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린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지금처럼 정부와 국회가 손을 놓고 직무를 유기하면 이런 비극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불법 유통되는 낙태약으로 과다 출혈이나 자궁 파열이 되면 아기는 물론이고 여성의 생명도 잃을 수 있다. 의료계는 “큰 사고가 나야 국회가 법을 개정할 것인가”라며 개탄하고 있다.

약물로든 수술로든 아기와 태반이 여성의 몸 밖으로 모두 나와야 낙태가 이뤄진다. 따라서 약물 낙태는 아기가 작은 임신 초기에 해야 안전하다. 이 때문에 많은 국가에서 임신 7주 이내에서 주로 시행하고, 최대한 임신 9주까지 의사의 관리를 받으며 사용하도록 한다. 약물 낙태는 수술보다 출혈이 많을 수 있어 빈혈이 있거나 혈액 응고 장애, 심혈관 질환 등이 있는 여성은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자궁 외 임신인 경우는 난관 파열과 같은 합병증 위험이 있어 반드시 사용 전에 초음파 검사로 정상 임신 여부와 정확한 임신 주 수를 확인해야 한다. 이런 약을 불법으로 판매하는 사람들은 ‘자연유산 유도약’으로 선전하며 마치 뱃속에서 아기가 자연스레 없어지는 것처럼 국민을 오도하고 있다. 자연유산은 외부 개입에 의하지 않고 유산되는 것이니, 이는 ‘낙태약’ 또는 ‘인공유산약’이라 해야 한다.

입법 공백 상태에서도 산부인과 의료계는 아무 조건 없이 하는 낙태는 임신 10주 미만에 하고, 10주부터 22주 미만에는 충분한 설명과 숙려 기간을 거쳐 최대한 신중하게 임하고 있다. 아기의 생존 가능성이 있는 임신 22주부터는 낙태하지 않으며, 임신 지속이 여성 건강에 심각한 위험이 있어 임신을 중단하는 경우는 낙태가 아니라 조산이므로 미숙아에 대한 의학적 조치를 하는 ‘선별적 낙태 거부’로 대응하고 있다. 임신 4개월 이후에 사망한 태아는 장사법에 의해 장례를 치러야 한다.

정부는 이제라도 여성들이 안전한 의료 시스템에서 낙태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무자격자에 의한 낙태를 근절해야 한다. 국회는 아기들이 변기에서 죽고 쓰레기로 버려지지 않도록 신속히 법을 개정해야 한다.

최안나 대한산부인과학회 낙태법특별위원회 간사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