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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탱크에 손발 묶인 초등생···그 후 마을에 생긴 유리문 정체 [e즐펀한 토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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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돋이마을 안 강화유리문 정체는?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후 살해한 김길태가 2010년 3월 12일 구속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부산 사상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중앙포토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후 살해한 김길태가 2010년 3월 12일 구속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부산 사상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중앙포토

“삐용삐용…. 철커덩”
지난 18일 오후 3시 부산시 영도구 청학동 해돋이마을. 마을 안쪽에 설치된 안심부스 내 비상벨을 누르자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괴한이 뒤쫓아오거나 위급상황이 났을 때 대피할 수 있는 안심부스가 작동한 순간이다. 이곳에 들어가 비상벨을 누르면 강화유리로 된 출입문이 순식간에 닫힌다. 해제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절대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은지의 ‘부산 뭐시라꼬’ #약자 대피소 '안심부스' 만든 김길태 사건 #부산 우범지역 예산 셉테드 사업 '반토막' #

2014년 11월 설치된 해돋이마을 안심부스는 사람 한 명 정도가 누울 수 있는 크기다. 부스 안에는 공중전화기가 설치돼 있어 112로 신고하면 곧바로 경찰이 출동한다. 안심부스를 관리하는 영도경찰서 생활안전과 이경선 계장은 “안심부스 설치 후 성범죄 발생률은 0%”라고 했다.

부산 영도구 청학동 해돋이마을에 설치된 안전부스 내 비상벨. 비상벨을 누르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자동으로 닫힌다. 송봉근 기자

부산 영도구 청학동 해돋이마을에 설치된 안전부스 내 비상벨. 비상벨을 누르면 사이렌 소리와 함께 출입문이 자동으로 닫힌다. 송봉근 기자

김길태, 2010년 폐가서 초등학생 성폭행 후 살해 

전국 최초로 설치된 부산 안심부스는 김길태 사건이 발단이 됐다. 2010년 2월 24일 부산 사상구 덕포동에서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후 살해한 사건이다. 김길태(당시 33)는 당시 초등학생 A양(13)을 납치한 후 폐가에서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 9살 여아 성폭행 미수와 30대 부녀자 성폭행 등으로 11년간 복역하고 출소한 지 6개월 만에 저지른 범죄였다. 당시 재개발 예정지역이던 덕포동 일대는 곳곳에 공·폐가가 방치된 상태였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잠을 자던 초등학생이 납치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 공분이 일었다. 더구나 조두순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여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끔찍한 아동 성범죄가 또 발생하자 사회적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경찰은 A양 실종사건과 강력 범죄와의 관련성을 직감하고 사건 3일 만인 2월 27일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수사에는 경찰관 3만9000여명이 투입됐고, 헬리콥터를 이용한 항공수색도 했다. 하지만 A양은 실종 11일 만인 3월 7일 자신의 집에서 불과 50m 떨어진 주택의 옥상 물탱크에서 손발이 묶인 채 나체 상태의 주검으로 발견됐다.

성범죄와의 전쟁 선포…폐가 철거·우범지역 특별관리

부산 영도경찰서 범죄예방진단팀 민지수 경사가 부산 영도구 청학동 해돋이마을에 설치된 안전부스를 점검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부산 영도경찰서 범죄예방진단팀 민지수 경사가 부산 영도구 청학동 해돋이마을에 설치된 안전부스를 점검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경찰은 사건 4일 만인 2월 28일 김길태를 용의자로 특정하고도 번번이 검거에 실패했다. 눈앞에서 김길태를 4차례나 놓친 경찰은 A양이 실종된 지 2주 만인 3월 10일에야 덕포시장 인근 주차장에서 가까스로 검거했다.

김길태는 경찰과 격투 끝에 붙잡힌 후로도 ‘모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버텼다. 검거 5일째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한다”는 말을 들은 김길태는 자신에게 인간적으로 대했던 박명훈 경사를 찾았다고 한다. 박 경사는 “(네가 죽인) 그 아이도 너보다 형편이 어렵고 중학교 진학 꿈이 컸다”며 “그런 예비 여중생의 꿈을 네가 짓밟았다”는 말에 갈등하다 범행 일체를 인정했다.

당시 김길태 심문조사를 맡았던 부산경찰청 관계자는 “당시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다 박 경사의 말에 흔들리며 울음을 터뜨리던 김길태의 모습이 생생하다”며 “하지만 검사 앞에선 또다시 범행을 부인하고 분노를 드러내는 등 죄의식은 찾기 어려웠다”고 했다.

부산 영도구 청학동 해돋이마을에 설치된 특별방범 순찰구역 안내문. 송봉근 기자

부산 영도구 청학동 해돋이마을에 설치된 특별방범 순찰구역 안내문. 송봉근 기자

셉테드 사업 촉발한 김길태 사건…범죄예방 효과 입증 

김길태 사건은 해돋이마을을 비롯한 부산 전역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당시 부산경찰청은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부산 전역에 있는 폐가를 철거하거나 특별방범 구역으로 지정해 관리에 나섰다. 우범지대에 있는 치안센터가 파출소로 승격된 것도 김길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사건이 발생한 해돋이마을은 부산에서 손꼽히는 우범지역이었다. 400여명의 주민이 사는 건물 231개 중 허가받은 건물은 21곳뿐이며, 공·폐가 비율이 20%에 달했다.

김길태 사건 후 4년 8개월이 지난 2014년 11월. 법무부는 해돋이마을에 ‘범죄예방 환경개선사업’(셉테드·CPTED)을 추진했다. 어둡고 좁은 골목길에 가로등과 도로반사경,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하고, 안심부스를 전국 최초로 설치했다. 30년간 해돋이마을에서 거주한 이모(72)씨는 “해돋이마을은 산기슭 앞에 타원형으로 마을이 형성돼 범죄가 발생해도 외부에서 알기 힘든 구조”라며 “안심부스가 설치된 후 불안감이 줄었다는 주민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서울경찰 셉테드(CPTED) 학술세미나'가 2017년 6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김정훈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환영사를 하는 모습. 김경록 기자

'서울경찰 셉테드(CPTED) 학술세미나'가 2017년 6월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김정훈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환영사를 하는 모습. 김경록 기자

당초 셉테드 사업은 2005년부터 경찰청이 추진했지만 지지부진하다가 2010년 김길태 사건 후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법무부는 2014년~2020년 12월 총 89억원을 투입해 86곳에서 셉테드 사업을 진행했다. 경찰청도 2018년 1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총 2400여 개소에 환경개선 사업을 했다.

부산의 경우 해운대 A 골목, 서구 B 골목, 부산진 C 골목, 동래 D 골목 등 4곳에서 셉테드 사업이 진행됐다. 해운대 A 골목은 2017년 7월 셉테드 사업 이후 6개월간 발생한 성범죄, 절도, 폭력 등 5대 범죄는 2건으로 전년(8건) 대비 75% 감소했다. 해운대 A 골목에서 반경 500m 구역 내 발생 범죄는 같은 기간 78건에서 40건으로 48% 감소했다.

셉테드 사업 효과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예산 확보는 쉽지 않다. 부산은 셉테드 예산이 2015년 8억5000만원이던 것이 2020년에는 4억5000만원으로 반토막 났다.

김길태 사건이 발생한 부산 사상구 덕포1동 마을이 벽화로 재단장된 모습. 현재는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된 상태다. 중앙포토

김길태 사건이 발생한 부산 사상구 덕포1동 마을이 벽화로 재단장된 모습. 현재는 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된 상태다. 중앙포토

셉테드 사업에 지자체 예산 투입 근거 부족…조례 개정안 추진

부산시의회 윤지영 의원은 오는 6월 ‘부산광역시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조례 일부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셉테드 사업 기본계획을 5년 단위로 수립해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시비 지원 근거를 마련하는 게 골자다. 윤 의원은 “1인가구 증가로 원룸 등 소규모 건축물이 늘어나는 만큼 셉테드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조례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경찰청 생활안전과 김종만 범죄예방진단팀장은 “성범죄는 은폐시설물이 있거나 굽은 골목길 등에서 주로 발생하는 만큼 환경을 개선해주면 범죄 발생 확률을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는 7월부터 자치경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자치경찰제를 도입하는 주목적은 아동·청소년·노인·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성폭력 예방과 치안 강화다. 자치경찰제의 본격적인 시행을 맞아 셉테드 사업 확대를 제안해본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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