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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 미 대륙횡단기⑤] 몬타나 사막,더위와의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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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더위와 싸움이다. 엿새째 접어드는 미국 대륙 횡단에 모두들 지친 모습이 역력하다. 음식에, 시차에, 그리고 더위와 비바람이라는 자연과 싸워야 했다. 낭만 어린 정경을 감상하는 한국에서의 라이딩과는 거리가 멀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랬다.

어제 러시모어 국립공원에서 큰 바위 얼굴을 만난 300㎞의 주행이 그나마 쉴 수 있는 유일한 날인 듯했다.

오늘은 사우스 다코다 스피어피시부터 몬타나 빌링스까지 530㎞ 주행이다. 더위 때문에 일찍 기상했다. 상쾌한 아침 주행을 하자는 뜻에서다. 오전 6시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을 끝내고 7시에 출발했다.

아침 공기는 말 그대로 상쾌하다. 곧바로 고속도로로 들어섰지만 더위는 느낄 수 없다. 기온은 21도 정도다.

오늘의 할리는 '해리티지 소프테일'이다. 첫날 오후 탔던 것과 같다. 오늘은 사우스 다코다를 지나 와이오밍주를 거쳐 몬타나까지 간다. 대부분 구간이 사막과 다름없는 불모지대다. 모래 없는 사막이라고나 할까.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고속도로 중간에 기름이 떨어져 움직이지 못하면 탈수로 사망까지 이어졌다는 그런 곳이다. 그만큼 인적이 드문 구간이다. 남한보다 더 큰 사우스 다코다에 인구 70만명이라는 것이 그런 반증이다. 와이오밍이나 몬타나 역시 서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미국을 모두 뉴욕이나 LA와 같은 대도시만 생각하면 안된다.

전날 스터기스시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 후 졸음을 쫓기 위해 '에스프레소 커피'를 시켰다. 종업원 왈 "우리 동네(시)에 에스프레소 커피하는 집은 없다"며 "아메리칸 스타일의 커피를 한 양동이로 갔다 주겠다"고 말한다. 미국의 시골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 미국은 크고 다양한 나라다. 에스프레소는 사우스 다코다에서는 왠지 맞지 않는 말이다. 대도시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흔하게 보는 '스타벅스'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도시라 해봐야 인구 10만의 소도시만 다녔으니 있을 리 만무하다. 에스프레소의 진한 맛은 당분간 맛보기 어려울 듯 하다. 아메리칸 커피를 연신 마셨지만 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산뜻한 아침 공기 속에 고속도로에 들어서 시속 130㎞로 불과 2~3분 달렸을까. 맨 후미를 맡은 할리코리아 이계웅 사장의 멋진 외아들 이태흥군이 옆으로 다가와 정지 신호를 보낸다. (이군은 LA에서 건축전문 대학에 다니고 있다. 아버지보다 키도 크고 잘 생겼다. 오토바이도 잘 타고...) 깜짝 놀라 갓길에 바이크를 댔다. 아뿔싸! 새들 백(뒤에 달린 가죽으로 된 가방) 커버를 제대로 닫지 않았다. 고속으로 달리자 커버가 심하게 흩날렸다는 게 이군의 말이다. 가방 안에는 우장(雨裝)이 들어 있는데 자칫하면 내용물이 날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내 바이크 아닌 티를 심하게 낸 셈이다. 아직까지 그런 미세한 것에 익숙지 않다. 이군이 다가와 커버를 닫았다. 동료들은 벌써 한참 달려가 보이지 않는다.

시동을 다시 걸고 출발했다. 앞서간 동료를 따라잡기 위해 간만에 최고 속도로 쏠 기회가 왔다. 재빨리 기어를 6단까지 올리고 오른쪽 가속 핸들(드로틀)을 풀로 댕겼다. 할리 특유의 '두둥 두두둥'소리가 터져 나온다. 시속 165㎞가 순식간에 나왔지만 더 이상 속도는 증가하지 않는다. 할리는 고속 주행용 바이크가 아니다. 어깨를 떡 벌리고 직각으로 않은 자세로 탄다. 뭔가 폼은 나지만 대신 바람의 저항도 대단하다. 시속 130㎞가 넘으면 헬멧이 정신 못차리게 흔들린다. 귓가에는 바람소리만 들려 mp3 음악도 듣기 어려울 정도다.

한 마디로 '뽀다구'는 나지만 재미없는 바이크가 할리다. 그저 '다다다다다...'하고 대륙을 달리는 바이크라고나 할까. 날쌘 것과는 거리가 멀다.

5분여 만에 동료들이 나타났다. 이윽고 대열에 합류해 한 시간 반쯤 달렸을까. 기름이 절반 이하로 떨어져 고속도로를 나가 주유소에 들어섰다. 이제 회원들은 주유 선수다. 처음 서툴렀던 셀프 주유기가 이젠 너무 당연한듯 하다. 살살 주유기를 눌러 가득 채우는데 모두 일가견이 있다. 할리는 시속 120㎞가 넘으면 기름 벌레로 변한다. 워낙 무거운데다 바람 저항이 심해 연비가 ℓ당 15~20㎞정도밖에 안되는 듯 하다. 하지만 무겁다 보니 고속 주행에선 안정감이 좋다. 묵직한 핸들 덕분이다.

또다시 출발이다. 이번에는 진짜 끝없는 사막지대다. 고속도로로 들어서 왼쪽을 보니 길이 1㎞가 넘는 긴 석탄(?) 기차가 보인다. 땅을 파서 석탄을 캐 담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와 있는 석탄지대에서 그저 주워 담아 나를 뿐이다. 하느님은 너무 불공평하다. 미국엔 저런 자원까지 주셨으니 말이다. 경제 규모나 경제를 움직이는 동인들이 우리와 다른 것들이다. 다이너마이트로 땅을 파서 석탄을 파냈던 우리와 비교하면 그저 탄식과 부러움이 나올 뿐이다. 꼬리가 보이지도 않는 긴 기차는 석탄을 잔뜩 싣고 굼뱅이처럼 달린다.

오전 11시가 됐다. 이제 300㎞를 달렸으니 200㎞ 조금 넘게 남았다. 본격적으로 아스팔트 지열이 올라온다. 끔찍하다. 온도는 이미 35도를 넘어섰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할리의 V형 엔진은 용광로다. 시속 80㎞ 이하로 달리면 엔진열이 말 그대로 '사타구니를 강타'한다.

A조 한 회원은 바지 자크를 열고 달리자고 제안한다. 바람이 쏴- 하고 들어와 그나마 아랫도리(?)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러다 휴게소에서 깜빡 자크 올리는 것을 잊어버렸다가는 국제망신이다. 그냥 참기로 했다.

지루한 사막길을 달래기 위해 mp3를 귀에 꽂았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가 흘러나온다. 우리는 호텔 몬타나다.

12시를 막 지났다. 더위가 사나워진다. 이종배 회원이 헬멧 고장으로 갑자기 뒤처졌다. 잠시 갓길에 멈춰선 우리들은 점심을 늦게 하더라도 남은 200㎞를 시속 150㎞로 쉬지 않고 쏘자는데 합의했다. 이윽고 출발, 말 그대로 졸음과 배고픔을 참아가며 쏜다. 오로지 다다다다다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렇게 다다다다-다. 고속도로 퀵서비스라고나 할까. 그저 달릴 뿐이다.목적지를 향해.

진짜 한 시간 반을 그렇게 달렸다. 지겨운 사막지대를. 어느덧 몬타나 빌링스 표지판이 보인다. 오늘 점심은 중국집이다. 빌링스는 인구 10만의 도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 덕분에 먹고 산다.

뷔페식 중국 음식이다. 오랜만에 햄버거 아닌 음식을 먹어본다. 배가 고파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입에 맞는다.

식사 후에는 부근 할리 딜러샵을 찾았다. 모두 새 바이크라 첫 1000일 정기 점검이다. 계기판을 보니 2800㎞를 달렸다.

바이크를 그곳에 맡기고 20여분 떨어진 호텔에 차로 도착했다. 오후 4시 30분쯤 됐다. 해가 얼마나 강한지 햇살을 정면으로 받는 방은 에어컨을 아무리 세게 틀어도 더위가 가시지 않는다. 기온은 40도를 넘어섰다. 아스팔트 곳곳마다 녹은 모습들이 보인다.오늘은 사진 한장 찍을게 없었다.

'아 내일부턴 진짜 죽었구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하고 6시부터는 현지 할리 멤버들과 바비큐 파티다. 급하게 너무 많이 먹은 점심 탓인지 배가 고프지 않다. 밀린 기사를 위해 바비큐는 포기했다 (솔직히 소시지나 햄버거는 이제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난다).

역시 햄버거에 질린 윤명수 회장께서 '시금칫국 죽'을 제안하신다. 김치에 시금치죽, 이게 제맛이다.

오늘같은 주행이 이어진다면 이번 대륙 횡단은 말 그대로 '고생을 사서 한다', 아니면' 극기 훈련' 둘 중의 하나일 뿐일 게다.

기자는 내일 새벽 한국에 돌아가기로 했다. 딱 절반을 달린 셈이다. 2주일간의 출장이 부담스러워서다. 앞으로 남은 캘리포니아까지 가는 구간(로버트 몬다비 와인농장을 들르고 LA까지 가는 해안도로의 경치는 절경이라고 한다)이 재미있을 것이라며 여러 회원들이 말린다. 회사와 상의해 같이 가자고 한다.

오늘같은 사막지대를 더위와 싸우며 또 달린다면 돌아가는 게 진짜 기쁠 듯했다. 그래도 왠지 섭섭하다. 무엇보다 일주일간 회원들과 정이 든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엔진 소리.

가방을 꾸리면서 그동안 일정을 생각해봤다. 대륙 횡단에 기억나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한 가지다. "그저 앞에 가는 동료의 바이크를 쳐다보며 다다다다...끝도 없는 길 길 길"

그게 미국 대륙 횡단의 절반이었다. 큰 바위 얼굴은 그저 잠깐 지나가며 스쳐간 것일 뿐. 앞으로 남은 절반 동안 오로지 회원들의 건강을 빌 뿐이다.

※미국 대륙횡단 연재는 전화 취재를 통해 계속할 계획이다. 캘리포니아에 들어서면 LA지사의 백종춘 기자가 취재를 맡는다.

몬타나=김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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