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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갈 것이다”수염 씻고 자리에 누운 선비의 임종 전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00)

조선시대 큰선비들은 임종이 가까워지면 제자가 병석을 지키며 마지막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른바 고종기(考終記) 또는 고종일기(考終日記)다. 죽음을 앞둔 선비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초 8일 병자. …선생이 옆에서 시중드는 아이에게 ‘내가 잠을 자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미음을 가져오게 하고 몸을 일으키자, 앉아 조금 드셨다. 다시 물을 가져오게 했다. 양치하고 수염을 씻은 후 자리를 바르게 하고 누웠다. 류범휴가 들어가 병세를 살피고 탄식해 말하기를 ‘선생의 병세가 위독해 기력을 회복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으로서 몹시 어려운 지경인데도 선생의 마음은 안정돼 있고 기운은 여유가 있으며, 몸은 바르고 얼굴빛은 부드러웠습니다.’…아들 완이 베개에 엎드려 곁에서 소리 내 울고 있었다. 선생이 머리를 돌려 어렵게 말씀하시기를 ‘갈 것이다’ 하셨다.”

대산 이상정을 기리는 경북 안동시 남후면 고산서원. [사진 송의호]

대산 이상정을 기리는 경북 안동시 남후면 고산서원. [사진 송의호]

유학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이 병석에 누운 지 54일째 되던 12월 8일 저녁의 모습이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이다. 대산은 이렇게 자연의 이치에 따라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자리에 누워 자신의 삶을 돌아본 뒤 제자와 가족 등 7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연한 모습으로 잠을 자듯 눈을 감았다. 묘소는 안동 학가산 광흥사 동쪽에 있다.

대산은 퇴계 이황 선생에서 발원해 학봉 김성일 → 경당 장흥효 → 갈암 이현일 → 밀암 이재로 이어진 학통을 이어받아 이를 다시 정재 류치명 → 서산 김흥락으로 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 방대한 저술과 함께 고산정사를 중심으로 273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소퇴계(小退溪)’라 불리기도 했다.

이상정의 대표 저술인 『퇴계선생서절요』. 퇴계 이황의 편지글을 골라 엮은 책이다.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이상정의 대표 저술인 『퇴계선생서절요』. 퇴계 이황의 편지글을 골라 엮은 책이다.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대산은 병석에 누워 죽음을 직감해서인지 자신의 일상을 세세히 기록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의 고종일기는 1781년 10월 16일부터 12월 12일까지 57일간이며 기록한 일수는 42일 치다. 제자인 김종섭과 류범휴가 번갈아가며 쓴 것으로 보인다.

대산의 고종일기에는 자신이 병석에 있지만 배우기를 청하는 문도와 그들에 대한 배려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병세가 위중했지만 매일 찾아오는 문도들에게 학문적으로 도움을 주려 애썼다. 17일 을묘엔 이렇게 적혀 있다. “혈변 증세가 악화돼 붉은 설사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김윤수가 찾아와 배우기를 청했으나 환후 때문에 들어 줄 수 없었다. …병의 초기에는 오히려 힘껏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옆 사람이 선생의 몸이 손상될까 걱정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이상정의 사후에 내려진 이조판서 증직 교지.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이상정의 사후에 내려진 이조판서 증직 교지.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대산은 자력으로 움직일 힘조차 없어지자 문도들이 오면 그제야 아우인 소산 이광정에게 나아가 묻고 배울 것을 권했다. 대산은 병석을 지키던 소산의 요청으로 유계(遺誡)를 남긴다. 제자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하기를 권면했다. 후손들에겐 유가의 기풍을 강조하며 본분에 따라 실행하고 나아갈 것을 당부했다. 고종일기를 분석한 오용원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정책팀장은 “대산은 천리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며 생을 마무리하는 순천자(順天者)의 모습을 보였다”고 정리했다. 인격은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드러난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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