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경쟁 학파였던 퇴계 글 그대로 베껴 간직한 송시열

중앙일보

입력 2021.04.01 11:00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97)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 [사진 국립청주박물관‧송정훈]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 [사진 국립청주박물관‧송정훈]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 장기간 집권층을 형성한 노론의 영수였다. 그는 주자의 일점일획까지 따른 성리학자로 『송자대전(宋子大全)』이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우암이 쓴 글 중에는 비문도 있다. 그것도 아주 많다. 무려 522편으로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숫자다. 절의와 학문에 뛰어난 선현을 기리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여기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임금과 선비는 물론 평민과 여성까지 들어 있다. 김문준 건양대 교수는 『우암 송시열이 추앙한 위대한 선현들』이란 책에서 “우암이 남긴 비문은 그의 사상과 정신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라며 그의 저술이 너무 많아 접근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우암이 현창하는 첫 번째 주제는 성현의 학문을 이어 후세에 전한 대학자다. 고려 말 성리학을 크게 일으킨 정몽주의 신도비,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생명을 바친 조광조의 적려유허비, 영남학파의 한 축을 이룬 조식의 신도비, 조선 선비의 큰 스승 이황을 존숭하는 뜻을 담은 글 등이 있다.

그중 기호학파의 적통인 우암이 경쟁 관계였던 영남학파의 정점 퇴계 이황을 어떻게 보았을까. 송시열은 퇴계를 조선의 정통 도학을 잇고 지고의 학덕을 겸비한 스승으로 존경했다. 우암은 ‘퇴계 선생의 시를 써서 이자형에게 주는 설’과 ‘퇴계 이 선생 진적(眞蹟) 발(跋)’ 이란 글에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중 이자형에게 주는 설의 일부는 이렇다.

송시열이 여러 자손에게 내린 친필 글. [사진 국립청주박물관‧송정훈]

송시열이 여러 자손에게 내린 친필 글. [사진 국립청주박물관‧송정훈]

“율곡 선생의 종증손 이자형이 내가 있는 회천에 들러 연보를 언급하면서 빨리 수정해 주기를 청했다…나는 인자가 아니라 그의 뜻에 부응할 수 없어 부끄러웠다. 기억하건대 정암(조광조) 선생의 당질 조충남이 퇴계 선생에게 정암 선생의 행장을 지어 달라고 청하자 퇴계 선생이 이 시를 지어 주어 보냈다. ‘왕정에 서기 어린 봉 같은 의용 늘 생각다가/옥수를 만나 보니 그의 법도 알겠구려/훌륭함을 찬양하는 일 내 어찌 감당하랴/눈서리 천 리 길에 그대 보내기 부끄럽네’

오늘의 일도 마침 이 일과 부합하기 때문에 이 시를 써서 준다. 그러나 감히 나 자신을 선철에 견주는 것은 아니다. 해주에는 주자의 사당이 있어 정암·퇴계 두 선생이 율곡 선생과 함께 배향되었으니, 이자형은 더욱 이 시를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대전 우암사적공원 장판각에 보관된 『송자대전』의 목판 중 하나. [사진 국립청주박물관‧송정훈]

대전 우암사적공원 장판각에 보관된 『송자대전』의 목판 중 하나. [사진 국립청주박물관‧송정훈]

송시열이 병자호란을 겪은 뒤 쓴 글씨 ‘恥’(치.부끄럽다는 뜻). 대전 우암사적공원 유물전시관에 전시. [사진 송의호]

송시열이 병자호란을 겪은 뒤 쓴 글씨 ‘恥’(치.부끄럽다는 뜻). 대전 우암사적공원 유물전시관에 전시. [사진 송의호]

또 ‘퇴계 이 선생 진적 발’이란 글에는 “내가 며칠 동안 이(선생의 유묵)를 어루만지며 구경하다가 선생을 숭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해 한 통을 모사해 산재(山齋)에 간직해 두었다”고 적고 있다. 퇴계에 대한 우암의 존경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우암은 또 자신의 학문 연원인 이이·김장생의 학문과 행적에 관한 자운서원 묘정비와 돈암서원 묘정비, 평생의 동반자 송준길의 신도비 등을 지었다.

두 번째 주제는 조선 초기 절의였다. 우암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성삼문과 박팽년의 유허비를 지었다. 셋째는 국란에서 목숨을 던진 충의 정신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 항전하거나 의병을 일으킨 이순신·조헌·권율·신립·송상현·정기룡 등에 관한 묘비나 신도비 등을 지었다. 여성의 묘지문도 22편이나 전한다. 후세에 도와 의를 전하려는 지식인의 책무이자 봉사였을까.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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