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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좋은 전답보다 낫다"정약용이 아들에 당부한 ‘근·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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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99)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있는 사당 문도사의 정약용 초상화. [사진 송의호]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있는 사당 문도사의 정약용 초상화. [사진 송의호]

영화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책을 쓰다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유배지에서 얻은 어린 두 아들이 상주가 돼 빈소를 지키는 모습이 짠하다.

정약전과 동생 정약용은 당시 금기시된 서교(西敎, 천주교)를 받아들인 죄목으로 모두 유배형을 받았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동해안 장기를 거쳐 강진으로 보내졌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5형제 중 둘째와 넷째로 둘 다 과거에 급제한 조선의 인재였다. 정약용은 형 약전과 뜻이 맞아 유배지에서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영화 '자산어보' 포스터.

영화 '자산어보' 포스터.

‘자산어보’ 저술에 관해서도 편지가 오갔다. 약용은 형의 저술을 응원하면서 방법론을 제안한다. “책을 저술하는 한 가지 일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반드시 십분 유의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해족도설(海族圖說, 자산어보의 처음 이름으로 추정)』은 무척 기이한 책이니 이것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도형(圖形)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글로 쓰는 것이 그림을 그려 색칠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마재 마을 뒷산에 자리한 정약용의 묘소. [사진 송의호]

마재 마을 뒷산에 자리한 정약용의 묘소. [사진 송의호]

정약용은 형과 함께 자신의 두 아들에게도 그때그때 당부의 편지를 썼다. 정약용에게 편지는 속마음을 그대로 터놓는 소중한 미디어였다. 자신의 힘겨운 유배 생활 속에서 두 아들에게 희망과 깨우침을 담아 보내는 일이었다. 정약용은 8대 옥당(玉堂, 홍문관)을 지낸 명문가가 자신 대에 이르러 폐족(廢族)이 되었음을 두 아들을 향해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폐족이 글을 읽지 않고 몸을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 구실을 하랴”, “폐족이라 벼슬은 못하지만 성인(聖人)이야 되지 못하겠느냐, 문장가가 되지 못하겠느냐?”라며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큰길을 제시한다.

둘째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선 인간미가 넘친다. “네 형이 왔기에 시험 삼아 술을 마시게 했더니, 한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더구나. 그래서 동생인 네 주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네 형의 배도 넘는다고 하더구나. 어찌하여 글공부는 이 애비를 잇지 않고 술만은 이 애비를 넘느냐. 이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너의 외조부이신 절도사공은 술 일곱 잔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지만 평생 술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으셨다. 노년에 이르러 작은 술잔 하나를 만들어 입술만 적셨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술 마시는 법은 물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써야 하는지도 일러 준다.

‘가계(家誡)’ 편에는 지혜가 번득이는 교훈을 적는다. “나는 전원을 너희에게 남겨줄 수 있을 만한 벼슬은 하지 않았다만 오직 두 글자 신부(神符)가 있어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제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는 소홀히 여기지 말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수용(需用)해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에서 돌아와 만년을 보낸 여유당. 남한강 두물머리 인근에 있다. [사진 송의호]

정약용이 강진 유배에서 돌아와 만년을 보낸 여유당. 남한강 두물머리 인근에 있다. [사진 송의호]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머물렀던 다산초당. [사진 실학박물관]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머물렀던 다산초당. [사진 실학박물관]

훗날 유배지에서 살아 돌아온 정약용은 흑산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한 형 약전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정약용은 이렇게 형제간에도 부자간에도 정이 많았던 지식인이었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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