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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표현물' 논란 김일성 회고록, 구매하면 국보법 처벌 받나

중앙일보

입력

국내 출판사인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이 지난 1일 북한 김일성(1912~1994)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판본 전집을 들여와 『세기와 더불어 항일회고록 세트』(전 8권)로 시판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국가보안법상 이적(利敵)표현물 논란이 뜨겁다. 인터넷 교보문고 등에선 이 전집을 28만원에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198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연합뉴스

북한 김일성 주석이 198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연합뉴스

『세기와 더불어』는 1992년 4월 15일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맞아 북한 평양의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그해 같은 달부터 1997년 8월까지 대외선전용으로 펴낸 김일성 회고록이다.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 4월부터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까지의 일대기다. 이 책이 한국에서 정식 출판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22일 통일부가 정확한 출간 경위를 파악하고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 판례에 따르면 『세기와 더불어』 원전은 이적표현물이다. 2011년 7월 대법원은 북한 체제를 추종해 허가 없이 방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모씨에 대한 원심판결(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확정하면서 “『세기와 더불어』를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시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2009년 6월 판결을 통해 정씨가 2002년경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북한 서적 전문판매점 ‘고려서적’ 등지에서 구입해 보관하던 『세기와 더불어』에 대해 “김일성의 전 가계를 항일 독립투사로 날조하고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미화·찬양하는 내용”이라며 이적표현물로 규정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작성한 자신의 회고록 집필요강의 일부. 중앙포토

북한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작성한 자신의 회고록 집필요강의 일부. 중앙포토

정씨는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의 회고록일 뿐 이적표현물이 아니다”라며 항소했지만, 이어진 항소심에서도 그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2심 재판부는 2009년 8월 판결에서 “『세기와 더불어』는 선군정치를 미화하고 수령론에 입각해 김일성 부자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며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내용”이라며 “책의 실질적인 내용, 제작 주체와 제작 목적 등에 비춰 보면 대한민국의 존립·안전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으로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반면, 출판사 측은 인터넷서점 등에 게재한 책 소개를 통해 『세기와 더불어』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그 날까지 중국 만주벌판과 백두산 밀영을 드나들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생생한 기록”이라며 “혹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싸워온 투쟁기록을 고스란히 녹여 낸 진솔한 내용을 수채화처럼 그려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실 일제 치하에선 김 장군을 전설적 인간으로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이제 본인의 회고록으로 의문의 여지는 풀렸다 하겠다”고 덧붙였다.

법원 “이적 행위 목적 없는 단순 소지는 무죄” 추세

한국 출판사인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이 『세기와 더불어 항일회고록 세트』(전 8권)를 지난 1일 정식 출간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서적은 북한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1992~1997년 출간한 『세기와 더불어』와 그 내용이 같다. [사진 인터넷교보문고]

한국 출판사인 '도서출판 민족사랑방'이 『세기와 더불어 항일회고록 세트』(전 8권)를 지난 1일 정식 출간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서적은 북한 조선노동당 출판사가 1992~1997년 출간한 『세기와 더불어』와 그 내용이 같다. [사진 인터넷교보문고]

인터넷서점을 통해 판매 중인 『세기와 더불어 항일회고록 세트』를 사도 괜찮은 걸까. 법조계에 따르면, 해당 서적 역시 북한 원전이 아니더라도 이적표현물에 해당할 수 있다. 공안 분야에 정통한 한 변호사는 “원전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내용과 게재 경위 등에 따라 이적성이 결정된다. 원전을 인용한 문건도 이적표현물로 인정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보안법 7조 5항은 ‘반국가단체 또는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동조하는 (이적)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이적표현물)을 제작·수입·판매·소지·반포·판매·취득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적표현물 소지한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상 유죄로 처벌했던 과거와 달리 2000년대 중반 이후 법원은 이적 목적이 있는지를 엄격히 해석해 단순 소지만으론 유죄를 선고하지 않고 있다. 2015년 11월 대법원이 북한 노동신문 기사를 개인 인터넷 블로그에 비공개로 올리고 『김일성 선집 1권』 등 이적 도서 20여권을 소지한 혐의로 기소된 시나리오 작가에 대해 “이적 행위를 할 목적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확정한 게 대표적이다. 북한 문헌 등 특수자료 취급 인가를 받은 대학·연구기관·도서관 등이 관련 표현물을 보관하고, 별도의 허가 절차를 밟은 사람이 이를 열람하는 건 현행법상으로도 가능하다.

1994년 8월 8일 서울서대문경찰서 관계자들이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불법 발간하려 한 혐의로 서울 망원동 도서출판 '가서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4년 8월 8일 서울서대문경찰서 관계자들이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불법 발간하려 한 혐의로 서울 망원동 도서출판 '가서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고 있다. 중앙포토

헌법재판소에는 현재 이적표현물소지죄 등을 규정한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2건이 계류 중이다. 헌재는 앞서 1992년부터 2015년까지 국가보안법 7조에 대한 총 7차례의 헌법소원·위헌법률심판 등에서 합헌 결정을 내렸다. 2018년 4월 이적표현물소지죄에 자격정지를 병과하는 건 위헌이라며 제기된 헌법소원 사건에서도 합헌 결정을 하면서 “이적표현물을 소지하는 행위가 지니는 위험성이 이를 반포하는 행위에 비해 결코 적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주목할 건 당시 위헌 결정 정족수(6명)를 채우지 못했지만, 재판관 9명 중 위헌 의견(5명)이 합헌 의견(4명)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5명(이진성·김이수·강일원·이선애·유남석)은 “유포·전파행위 자체를 처벌함으로써 이적표현물의 유통 및 전파를 충분히 차단할 수 있으므로 그 단계에 이르지 않은 소지 행위를 미리 처벌하는 것은 과도한 규제”라며 “반대자나 소수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오·남용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 최근 이적표현물소지죄에 대한 위헌 의견이 늘어나는 추세인 만큼 향후 위헌 결정으로 뒤집힐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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