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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갈아타자…250만개 계좌에 대기자금만 4조6000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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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해 초 정년퇴직한 박모(61)씨는 지난 1월부터 암호화폐 투자를 시작했다. 여유자금 2000만원을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암호화폐)에 투자했다. 계좌 개설까지는 자녀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후 매매는 스스로 하고 있다. 박씨는 “부동산과 주식의 투자수익이 지지부진해 코인 투자를 시작했다”며 “아직 수익은 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오름세가 이어질 것 같아 당분간 투자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 라운지에 설치된 전광판에 비트코인 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이날 비트코인 가격은 한때 7,300만원때까지 떨어졌다. 뉴스1

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 라운지에 설치된 전광판에 비트코인 가격이 표시되고 있다. 이날 비트코인 가격은 한때 7,300만원때까지 떨어졌다. 뉴스1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투자 광풍이 불고 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암호화폐 투자에 뛰어들며 계좌와 예탁금이 급증하고 있다. 실명계좌는 250만개를 넘어섰고 투자자 예탁금만 4조6000억원에 이른다.

김병욱 의원 "투자자 보호 위한 법 제정 검토해야"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위원회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말 기준 4대 암호화폐 거래소(빗썸ㆍ업비트ㆍ코인원ㆍ코빗)에 개설된 실명확인 계좌 수는 250만1769개다. 2020년 말 계좌 수가 133만6425개였으니, 두 달만에 2배가 늘어났다.

국내 은행의 실명 확인 계좌를 이용해 암호화폐 거래를 해야 하는 대형 암호화폐 거래소 4곳의 계좌수만 합산했다. 실명확인 계좌를 이용하지 않는 거래소에서 투자하는 개인들은 포함돼 있지 않다.

늘어나는 암호화폐 투자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늘어나는 암호화폐 투자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암호화폐를 사기 위한 '실탄'은 더욱 두둑해지고 있다. 지난 2월 말 기준 거래소 4곳의 투자자예탁금은 4조6191억원으로, 20년 말(1조7537억원)보다 2.5배 늘었다. 계좌보다 예탁금이 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1분기(8703억원)→2분기(8856억원)→3분기(9181억원) 등 완만하게 늘었던 예탁금은 지난해 4분기를 기점으로 증가 속도가 가팔라졌다.

예탁금 규모만 따지면 암호화폐 투자 열풍을 주도하는 것은 30~40대다. 연령별 예탁금은 30대가 1조5709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40대(1조2333억원)와 50대(7201억원), 20대(6863억원) 등의 순이다. 60대 이상 실버투자자가 쟁여놓은 돈도 2919억원에 이른다.

암호화폐 투자붐에 급증한 투자자 예탁금.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암호화폐 투자붐에 급증한 투자자 예탁금.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늘어나는 건 투자 대기자금 뿐만이 아니다. 뜨거워진 시장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거래금액도 급증하고 있다.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실이 금융위에서 받은 4대 암호화폐 거래소의 올해 1분기(1~3월) 거래금액은 1486조2770억원이다. 지난해 연간 거래금액(357조3449억원)을 이미 넘어섰다. 거래금액은 1월(292조1236억)→2월(463조1547억원)→3월(730조9987억원) 등 매달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일일 거래액도 코스피 시장을 앞질렀다. 암호화폐 정보사이트인 코인마캣캡에 따르면 19일 오후 5시 기준으로 4대 암호화폐 거래소의 일평균 거래액은 25조8561억원이다. 같은 날 기준 코스피 거래대금(15조1722억원)보다 많다.

3040이 주도하는 암호화폐 투자 열풍.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3040이 주도하는 암호화폐 투자 열풍.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암호화폐 투자가 제대로 탄력을 받은 건 연초부터 가격이 오르면서다. 비트코인은 올해 1월 2일 3만3000달러를 넘어선 뒤 지난 14일 6만4000달러를 돌파하며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비트코인을 제외한 알트코인의 상승세는 더 가파르다. 도지코인은 최고점이던 지난 16일 45센트에 거래돼 연초(0.47센트)와 비교하면 9500% 상승했다.

반면 지난해 연말부터 오름세였던 주식시장은 조정기를 겪고 있다. 코스피 지수는 지난 1월 25일(3208.9) 최고점을 찍은 뒤 3000~3200을 오가며 횡보를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 74조4559억원(1월12일)까지 늘었던 주식 시장의 투자자 예탁금은 지난 15일 기준 65조6537억원으로 줄었다. 지난 1월 1조2927억원이던 개인의 일평균 순매수 금액(유가증권시장+코스닥 시장)도 4월에는 200억원대로 줄어들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주식시장에 유입된 개인투자자들은 30~40%의 고수익에 익숙하다”며 “최근 주식시장이 조정기에 들어서자 이들이 상대적으로 고수익의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시장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암호화폐 거래금액 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암호화폐 거래금액 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다들 암호화폐로 돈을 벌고 있는데 나만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인 이른바 포모(FOMOㆍFear Of Missing Out) 증후군도 투자를 부추기고 있다. 최근 온라인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암호화폐 투자로 수십억원을 벌어 직장을 퇴사했거나 100만 원을 수억원으로 불렸다는 투자 성공기가 퍼진 탓이다.

직장인인 정모(37)씨도 '포모 증후군'에 최근 암호화폐 투자를 시작했다. 정씨는 주식을 정리해 3000만원 가량을 밀크와 메디 등 일반 투자자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알트코인이 투자했다. 정씨는 “이미 많이 오른 비트코인으로는 큰 대박을 내기 힘들 것 같다”며 “도지코인만 해도 100배 넘게 올랐는데, 투자한 코인 중 하나만 상승해도 나머지 코인에서 본 손실을 만회하고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중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암호화폐연구센터장)은 “개당 십원 단위의 알트코인 수 백원으로 오르는 일이 이어지며 생긴 ‘불패신화’와 풍부한 유동성이 결합되며 알트코인에 돈이 몰리고 있다”며 “알트코인은 깜깜이 투자가 많은 만큼 정부가 나서 거래소가 발행량 등의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시하게 해 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장의 과열 속 각국 정부가 '암호화폐 조이기'에 나서며 가격은 출렁이고 있다. 지난 16일 터키 정부가 상품과 서비스 비용 지불 수단으로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사용을 금지하고, 이튿날 미국 재무부가 암호화폐를 이용한 돈세탁 조사에 나선다는 루머가 퍼지며 비트코인 등의 가격은 급락했다. 국내에서도 암호화폐를 이용한 자금 세탁과 불법 거래, 사기 등을 집중 단속하기로 했다.

미 암호화폐 거래소 크라켄의 제시 파월 최고경영자(CEO)는 CNBC에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 불확실성이 단시간에 해소되기 힘들다”며 “각국 정부의 엄중한 단속이 시작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신규상장도 상장폐지도 빈번한 암호화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신규상장도 상장폐지도 빈번한 암호화폐.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하지만 시장은 빈틈 투성이다. 암호화폐 상장은 거래소가 자체적으로 판단해 진행한다. 지난해의 경우 230개의 암호화폐가 새로 상장됐고 97개가 상장폐지됐다. 일본은 금융당국의 화이트리스트 코인심사를 거쳐야 상장이 가능하다. 김병욱 의원은 “암호화폐 투자자가 늘어난 만큼 투자자 보호를 위한 내용을 담은 가상자산 업권법 제정 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반면 금융당국 관계자는 “자금세탁이나 투자사기 등 불법 행위 단속에 중점을 두고 있다”며 “암호화폐 전반을 규율하는 법안을 만드는 것 등은 아직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투자자 보호 등의 법적 규제도 여전히 공백 상태다. 암호화폐 거래소 관계자는 “특정금융정보법은 실명계좌 확인 등 자금세탁이 초점이 맞춰져 있어 투자자 보호와는 무관한 법”이라며 “3년 전부터 투자자 보호 관련 내용을 제도화해달라고 금융당국 등에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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