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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맛없는 한국 맥주는 가라”… 여기가 수제맥주 1번지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64)

대한민국 수제맥주 20년사③ 수제맥주 시대의 서막, 경리단길

하우스맥주 열풍이 속절없이 사그라지고 있던 2010년 서울 용산구 경리단길에서는 새로운 한국 맥주 역사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국군재정관리단(옛 육군중앙경리단)에서부터 하얏트호텔까지 이어지는 도로 일대를 일컫는 경리단길은 이 시기에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닳을 대로 닳은 느낌의 이태원 중심 상권에서 도보 20여분 거리에 있는 이곳은 수수했지만 트렌디하고 감각적이었다. 도로변과 좁은 골목 골목에 이태원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온 작은 카페, 식당, 펍 등이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들어찼다.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경리단길 상권은 2015~2016년까지 황금기를 누렸다. 이후 경리단길은 황리단길(경주 황남동), 해리단길(부산 해운대), 객리단길(전주 객사), 망리단길(서울 망원동), 송리단길(서울 송파) 등 ‘단길’ 네이밍의 시초가 됐다.

크래프트웍스 맥주. [사진 트립어드바이저]

크래프트웍스 맥주. [사진 트립어드바이저]

6호선 녹사평역에서 경리단길이 시작되는 교차로를 지나 만나게 되는 골목은 한국 수제맥주의 성지로 불린다. 2010년경 이곳에는 각자 여러 이유로 미국, 영국, 캐나다 등 고향을 떠나 한국에 살게 된 외국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한국 맥주에 지친 이들이었다.

경리단길 맥주의 시초는 크래프트웍스(Craftworks)였다. 크래프트웍스는 캐나다에서 온 댄 브룬 등 외국인이 공동으로 운영한 펍으로 2010년 11월 문을 열었다. 직접 맥주를 양조하지는 않았지만 자체 레시피를 개발해 카브루에 위탁 생산하는 방식으로 판매했다. 페일 에일, 인디아 페일 에일(IPA), 포터 등 미국식 맥주에 설악, 지리산, 북한산, 백두산, 남산, 금강 등과 같은 한글 이름을 붙였다. 요즘은 흔해 빠졌지만 당시 맥주에 붙은 한글 이름은 생소하면서도 쿨했다. 여기에 크래프트웍스 매장의 직원들은 모두 외국인이어서 방문 자체가 색다른 체험으로 느껴졌다. 크래프트웍스는 프랜차이즈 형태로 지점을 확대하다가 현재는 오래된 경리단길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경리단길 맥파이 펍. [사진 맥파이]

경리단길 맥파이 펍. [사진 맥파이]

또 이즈음 조금 더 안쪽 골목으로 접어들면 외국인들이 모여 맥주를 만들고, 마시고 있었다. 현재는 제주도에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는 맥파이 브루잉의 초창기 모습이었다. 미국과 캐나다 출신인 에릭, 티파니, 핫산, 제이슨 4명은 이곳에 좋은 소식을 가져다준다는 ‘까치(magpie)’라는 이름을 붙이고 맥주를 팔면서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맥주를 만들기도 했다. 외국인들이 10평 남짓한 작은 업장 안팎에 대충 걸터앉아 피자 한 판을 깔아놓고 맥주를 마시면서 오랜 시간 대화하는 모습은 참 신선했다. (피자와 맥주를 함께 먹는 ‘피맥’도 굳이 원조를 찾자면 이 거리다) 술이라면 자고로 안주를 한 상 펼쳐놓고 정좌하고 앉아, 경쟁적으로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 땅의 술꾼에게 참으로 이국적인 장면이었다. 카브루를 통해 맥주를 생산하던 맥파이는 2016년 제주도 동회천동의 빈 창고를 개조해 양조장을 설립했다. 지금도 경리단길에서 펍을 운영하고 있다.

경리단길을 맥주로 흥하게 한 데는 더부스 브루잉(The Booth Brewing)도 기여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한국 특파원이었던 대니얼 튜더 기자와 김희윤, 양성후 씨는 2013년 5월 더부스 펍의 문을 열었다. 2012년 11월 ‘화끈한 음식, 지루한 맥주(Fiery food, Boring beer)’라는 기사에서 ‘한국 맥주가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다’고 꼬집었던 대니얼 튜터 기자가 직접 맥주 업계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더부스 역시 초창기 카브루를 통해 맥주를 공급받다가 이후 벨기에, 미국 등의 양조장에서 생산한 대강 페일에일, 국민IPA 등을 내놨다. 경기도 판교에 작은 양조장을 차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정리하고 2016년 인수한 미국 캘리포니아 유레카의 양조장에서 맥주를 만들어 역수입하고 있다. 경리단길 더부스펍은 여전히 운영된다.

더부스 맥주. [사진 브루잉 홈페이지]

더부스 맥주. [사진 브루잉 홈페이지]

이때쯤이었다. 수제맥주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기 시작한 것이. 같은 소규모 양조장에서 생산된 맥주였지만 사람들은 하우스맥주가 아닌 수제맥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하우스맥주 열풍이 독일식 맥주로부터 시작됐다면 2010년을 전후해 퍼지기 시작한 맥주는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크래프트 맥주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소규모 맥주 업계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금주법이 사라지고 1980년대부터 시작된 크래프트 맥주 트렌드에 따라 2010년 즈음 미국 전역에는 2000개가 넘는 양조장이 있었고, 매년 10% 이상 성장을 거듭했다. 미국 양조장들은 영국의 전통 맥주인 IPA, 페일 에일, 포터와 같은 스타일을 재해석해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IPA는 미국산 홉이 뿜어내는 강렬한 개성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우리나라에도 2011년 미국산 IPA인 인디카가 최초로 수입됐다.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외국인들이 초기 국내 시장을 주도하면서 크래프트 맥주를 직역한 ‘수제맥주’, ‘공예맥주’, ‘장인맥주’라는 말이 등장했다. 과도기를 거쳐 ‘정성을 담아 만든 고급스러운 제품’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수제라는 단어가 널리 퍼져 수제맥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미국의 크래프트 맥주라는 말에는 단순히 대기업이 만든 제품과 구분되는 소규모 맥주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정신과 철학이 담겨 있다. 미국의 양조자협회(BA)는 크래프트 양조자를 소규모, 자본의 독립 등으로 정의한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인디 정신, 창의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 최고의 맥주를 만들어낸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녹아 있는 말이다. 맥주를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시장을 이끄는 수제맥주 시대가 온 것이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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