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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갈등 와중에…대만 '코앞' 포격전 현장서 만나는 한·중 외교장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오는 3일 중국 샤먼 한·중 외교장관 회담장 인근에 위치한 ‘일국양제 통일중국’ 간판. [바이두 캡처]

오는 3일 중국 샤먼 한·중 외교장관 회담장 인근에 위치한 ‘일국양제 통일중국’ 간판. [바이두 캡처]

내달 3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중국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 하이웨(海悅) 산장호텔에서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한·중 회담을 갖는다. 정 장관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이다.

샤먼 회담장, 대만 금문도와 10km 거리 #‘일국양제 통일중국’ 초대형 선전 간판도 #마오쩌둥, 미·소·대만 이간 노려 금문 포격 #미·중 '신 냉전'에 속 양안 긴장도 고조

이번 한·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중국 측이 제안했다는 회담 장소다. 하이웨 호텔은 샤먼시 쓰밍취(思明區) 환다오난루(環島南路) 해안도로와 접해 있다. 동쪽으로 10여㎞ 바다를 건너면 대만이 관할하는 소금문도(小金門島)와 대금문도(大金門島)가 있다. 날씨가 화창할 때는 해안가에서 섬이 보일 정도로 지척이다. 회담장 동쪽으로 3.2㎞ 떨어진 해안가에는 “일국양제 통일중국(一國兩制 統一中國)”이 새겨진 커다란 입간판도 서 있다. 중국이 대만 등을 향해  '하나의 중국'을 강조할 때 쓰는 구호다. 미·중 패권경쟁이 본격화하면서 대만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회담 장소의 상징성이 작지 않다는 지적이다.

1958년 중국군이 대만 금문도를 향해 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바이두 캡처]

1958년 중국군이 대만 금문도를 향해 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바이두 캡처]

지금은 샤먼과 금문도 사이에 여객선이 오가지만 냉전 시절엔 포탄이 오가던 최전선이었다. 중국이 금문포전(金門炮戰), 대만은 8·23 포전으로 부르는 1958년 8월에 벌어진 전투였다.

대만 금문도 해안에 모형 탱크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신경진 기자

대만 금문도 해안에 모형 탱크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신경진 기자

1958년 7월 25일 베이징 동쪽 베이다이허(北戴河) 해안가 휴양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회의가 열린 뒤 포격전이 확정됐다. 당시 마오쩌둥의 노림수는 네 가지였다. 첫째, 중동의 미국 군대를 견제한다. 둘째, 미·소 화해를 방해한다. 셋째, 미국과 대만 관계를 이간한다. 넷째, 대만이 중국 해안 일대에서 벌이는 게릴라전을 응징한다.

하지만 마침 푸젠성에 태풍이 몰아쳤다. 19일간 큰비가 이어졌다. 포격전 준비가 곤란해지자 마오쩌둥(毛澤東)은 잠을 설쳤다.

7월 27일 마오는 펑더화이(彭德懷) 당시 국방부장과 황커청(黃克誠) 참모장에게 편지를 썼다. “금문도 타격을 적당할 때까지 멈추자. 저들이 무리하게 진격하기를 기다려 반격하자.” 편지를 받은 펑더화이는 푸저우(福州) 군구예페이(葉飛) 정치위원에게 전달했다.

7월 29일부터 8월 22일까지 국민당 공군이 연안을 공습했다. 공산당 인민해방군과 네 차례 공중전이 벌어졌다.

8월 6일 국민당은 대만·펑후(澎湖·팽호)·금문도·마쭈다오(馬祖島·마조도)에 비상사태를 발령했다. 8월 19일 장제스(蔣介石)가 아들 장징궈(蔣經國)를 대동하고 금문도를 시찰했다. “금문아 금문아. 맨눈으로 직접 샤먼과 대륙 산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외쳤다. 현장 지휘관에게 전투 준비를 독려했다. 21일 대만으로 돌아갔다.

대만 금문도 해안가에 새겨진 ‘삼민주의 통일중국’ 구호. [바이두 캡처]

대만 금문도 해안가에 새겨진 ‘삼민주의 통일중국’ 구호. [바이두 캡처]

20일 베이다이허의 마오쩌둥은 푸젠의 예페이를 베이다이허로 불렀다. 예페이는 금문도 포격전 준비 상황을 보고했다. “계획대로 타격하라” 마오의 발사 명령이 떨어졌다.

8월 23일 17시 30분 2600발의 포탄이 금문도 태무산(太武山) 진지를 타격했다. 금문도를 지키던 국민당 ‘국군’ 부사령관 3명이 즉사했다. 85분간 3만여발이 쏟아졌다. 20분 뒤 금문도 포대 역시 불을 뿜었다. 하지만 2000여 발에 그쳤다. 당시 금문도의 5만여 주민과 섬을 수비하던 국민당군 8만 명이 지하 방공호로 대피했다.

1958년 중국군이 대만 금문도를 향해 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바이두 캡처]

1958년 중국군이 대만 금문도를 향해 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바이두 캡처]

10월 6일 새벽 1시 마오쩌둥은 ‘대만 동포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한다.

“대만·팽호·금문·마조 동포들.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다. 대만·팽호·금문·마조는 중국 영토다. 미국인의 영토가 아니다. 13만 금문 주민은 공급이 끊기고 굶주림과 추위가 덮칠 것이다. 오래 버티기 어렵다. 인도주의를 위해 이미 푸젠 전선에 10월 6일부터 7일간 포격을 멈추도록 명령했다. 자유롭게 보급품을 수송하라. 단 미국이 호위하면 안 된다.”

장제스도 비밀 채널을 통해 베이징에 메시지를 보냈다. “중공이 금문도 포격을 계속한다면 미국이 금문도와 마조도로부터 국민당군의 철수를 요구할 것이다. 이는 중국의 영원한 분열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오의 편지는 장제스의 비밀 서신이 전해진 뒤 발표됐다.

대만 금문도 전쟁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1949년 중국군의 금문도 상륙 작전 상황도. 사진=신경진 기자

대만 금문도 전쟁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1949년 중국군의 금문도 상륙 작전 상황도. 사진=신경진 기자

양측은 1958년 8월 23일부터 1959년 1월 7일까지 7차례 대규모 포격전을 치렀다. 공중전 13차례, 해전 3차례도 펼쳤다. 중국 측은 23척의 대만군 함정이 침몰하고 34대 전투기가 추락했다고 기록했다. 대만군의 인적 피해는 사망 7000여명. 중국 측 역시 민간인을 포함해 70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금문 포격전은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다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로 공식 종료됐다.

금문도에 떨어진 중국발 포탄의 숫자는 대략 100만 발. 포탄의 쇠를 녹여 만든 금문도 식칼은 금문 고량주와 함께 한국인에게도 유명하다.

최근 미·중간 '신 냉전'이 격화하면서 이 지역은 다시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고 있다.

존 헤네시닐랜드 팔라우 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28일 대만을 방문, 단교 후 42년 만에 대만을 방문한 대사가 됐다. 이에 맞서 중국이 군용기 10대를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진입시키는 등 무력시위를 벌였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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