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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운하, 미·중 경쟁 시대에 지정학적 가치 일깨웠다

중앙일보

입력 2021.03.3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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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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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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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운하 폐쇄 사태가 29일 일단락됐다. 전 세계 교역의 요충지가 지난 23일 400m 길이의 22만t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척에 막혀 글로벌 물류 위기를 불렀다. 사고를 낸 에버기븐호는 이날 네덜란드의 선박 구난업체인 스미트의 작업으로 물에 뜬 다음 자력으로 북쪽으로 항해했다. 이어 대기 선박들이 진입하면서 운하 통항이 재개됐다.

56년 이집트 나세르, 운하 국유화
배 한 척에 막힐 정도 허술한 실상
글로벌·디지털 시대 지정학 주목
미·중 요충지 확보 경쟁할지 관심

이번 사고는 전 세계가 빈틈없는 물류망으로 촘촘히 연결해 공생하는 글로벌 시대를 실감하게 했다. 단순 사고가 ‘물류 동맥경화’를 넘어 국제유가 등 글로벌 경제에 상당한 연쇄 파급효과를 낸 이유다.

동시에 ‘지정학·지경학적 급소’라는 용어의 의미를 새삼 일깨웠다. 수에즈운하는 국제정치에서 ‘초크포인트’라고 부르는 지정학적 요충지·관문의 하나다. 해양국가가 지정학적으로 국력을 유지했던 비결이다. 주요 해로의 병목인 호르무즈 해협, 믈라카 해협, 파나마 운하, 지브롤터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전 세계 교역의 약 90%가 해상으로 이뤄진다.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수에즈운하는 2020년 기준 연간 1만9000척의 선박이 통과했다. 무게로 12억5000만t이며 전 세계 교역량의 12%다. 수에즈운하는 길이 193.5㎞에 폭은 수상에선 313m이고 수심 24m의 밑바닥에선 121m다. 이런 좁은 수로에 컨테이너선이 대각선으로 걸리면서 물류가 일시 위기를 겪었다. 지정학적 요충지인 수에즈운하가 이렇게 좁고 허술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난 23일 수에즈운하에 좌초됐던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29일 다시 물에 떠오른 뒤 예인선에 이끌려 이동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지난 23일 수에즈운하에 좌초됐던 컨테이너선 에버기븐호가 29일 다시 물에 떠오른 뒤 예인선에 이끌려 이동하고 있다. [UPI=연합뉴스]

수에즈운하는 완공 당시인 1869년 제국주의 국가였던 영국·프랑스가 아시아 식민지와의 거리를 줄이고 경제적·국제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건설로 영국과 식민지 인도, 프랑스와 식민지 인도차이나와의 거리는 1만㎞가 단축됐다.

이런 수에즈운하는 20세기 들어 1956 ~59년과 67~75년 두 차례나 폐쇄됐다. 전쟁 때문이었다. 56년 6월 26일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18~70년, 재임 56~70년) 대통령이 영국 소유이던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56년 7월 26일 수에즈운하 지구를 침공하면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동란)을 일으켰다. 항공모함·전함·순양함·잠수함에 공수부대를 동원한 영국·프랑스는 군사적 승리를 거두고 운하 주변을 점령했다.

이집트가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 전투기가 운하를 폭격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이집트가 1956년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 전투기가 운하를 폭격하는 모습. [AP=연합뉴스]

하지만 외교에선 수세에 몰렸다. 당시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 1969년, 재임 53~61년) 대통령은 외교적으로 해결하라고 3국을 압박했다. 유엔은 특별 긴급총회를 열고 11월 2일 즉각 정전을 요구하는 총회 결의 997호를 채택했다. 사면초가 신세가 된 영국과 프랑스는 11월 6일, 이스라엘은 같은 달 8일 각각 정전에 동의했다.

시나이반도에 휴전선을 긋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제1차 유엔긴급군(UNEF)을 평화유지군(PKO)으로 파병했다. 유엔평화유지군의 기원이다. 당시 캐나다 외무부 장관으로 이를 제안한 레스터 피어슨(1897~1972년)은 이듬해인 5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을 설득하지 못하고 유엔과 국제사회의 압박을 받아 수에즈운하에서 철수하면서 강대국 지위의 상실을 절감했다. 이로써 지정학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내세우며 약소국의 주권을 무시하던 제국주의 시대는 사라졌다. 대국과 소국 개념도 시효를 마쳤다. 힘으로 남의 나라와 국민을 깔보고 괴롭히는 식민주의도 종말을 고했다. 유엔이 창설되면서 국제사회엔 주권존중·호혜·평등·상호존중·공존공영의 시대가 열렸다. 냉전이 가속하면서 세계 각국은 미국과 소련의 우산 아래에서 국제관계를 추구하게 됐다. 수에즈 동란은 중요한 교훈을 안겨준다. 글로벌 패권은 군사력·경제력 넘어 도덕성과 국제사회의 지지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AP=연합뉴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AP=연합뉴스]

수에즈운하는 아랍권이 이스라엘에 대패한 제3차 중동전쟁인 6일전쟁을 계기로 67년부터 75년까지 다시 닫혔다. 이스라엘도 73년 욤 키푸르 전쟁으로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에서 방심하다 아랍의 기습을 당해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무력으론 평화와 생존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국은 수에즈운하의 통행을 보장하는 협정을 맺었고, 미국은 74년 1만9500t급 강습상륙함 인천함 등을 보내 운하의 기뢰와 불발탄 등을 제거했다. 수에즈 운하는 75년 재개통됐으며 그 뒤로 이번 에버그린 사건까지 어떤 테러도, 전쟁도 운하의 통행을 막지 못했다.

문제는 중국이 이미 한 세기도 더 전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보여준 계책을 답습해 세계 곳곳에서 초크포인트 수집에 나선다는 점이다. 우선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지부티의 항만을 임대해 기지를 설치했다. 호르무즈 해협으로 이어지는 오만 해에 접한 파키스탄의 항구 과다르도 개발 중이다. 인도양에 접한 스리랑카의 남단 함반토타 항구도 확장하고 있다. 벵골 만에 있는 방글라데시 차토그람(과거 영어식 치타공에서 벵골어로 개명)에서도 공사가 한창이다. 미얀마에선 중국 서남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으로 이어지는 가스관·송유관 건설과 항구 개발을 진행 중이다. 일대일로 전략이다. 새삼스럽게 지정학적 가치를 일깨워준 수에즈운하 사태가 앞으로 미·중 각축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이 쏠린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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