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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는 암살, 부친은 사형선고 망명…필립공 고난의 가족사

중앙일보

입력 2021.04.20 06:00

업데이트 2021.04.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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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림공이 별세한 다음날인 지난 4월 10일 영국군 의장대가 수도 런던의 타워오브런던 앞 강변에서 고인을 기리는 조포를 발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필림공이 별세한 다음날인 지난 4월 10일 영국군 의장대가 수도 런던의 타워오브런던 앞 강변에서 고인을 기리는 조포를 발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9일 세상을 떠나 17일 장례식을 치른 에든버러공 필립(1921~2021년)은 유난히 굴곡진 역사를 온몸으로 겪었다. 필립공이 별세하자 사람들은 영국 여왕 부군으로서의 삶에만 초점을 맞췄다. 필립공은 영국의 왕위계승권자인 엘리자베스(94) 공주와 결혼한 1947년 7월부터 치면 만 73년간,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으로 즉위한 1952년 2월부터 따지면 만 69년간 배우자의 곁을 지켜왔다. 긴 세월이긴 하지만 이는 드러나고 주목받은 부분일 뿐이다.

영국 수도 런던의 중심지인 피카딜리 서커스 앞에 있는 광고판이 필립공의 대형 추모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필립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인 지난 4월 10일의 모습이다. EPA=연합뉴스

영국 수도 런던의 중심지인 피카딜리 서커스 앞에 있는 광고판이 필립공의 대형 추모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필립공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인 지난 4월 10일의 모습이다. EPA=연합뉴스

‘극단의 시대’ 살아온 필립공 100년

100년에서 두 달이 모자란 필립공의 삶은 거대한 변혁의 시대와 겹친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년)이 산업혁명부터 소련의 몰락까지를 다룬 『혁명의 시대 1789~1848』 『자본의 시대 1848~1875』 『제국의 시대 1875~1914』 『극단의 시대 1914~1991』 등 4권의 시대 시리즈 중에서 마지막에 해당하는 시대다. 말 그대로 ‘극단의 시대’였다.
홈스봄이 자신의 저서에서 다른 인물들의 말을 빌려 ‘서양사에서 가장 끔찍한 세기’(영국 철학자 이사야 벌린(에이제이어 벌린)), ‘학살과 전쟁의 세기’(프랑스 생태학자 르네 뒤몽), ‘인류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세기’(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영국 작가 윌리엄 골딩)로 표현한 시대다. ‘더 나은 것들을 위한 혁명이 일어났고, 제4 신문이 부상했으며, 여성들의 수 세기의 억압에서 벗어난 시대’(198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신경학자)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20세기에 인류는 전쟁의 참화와 함께 거대한 커다란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친가는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가
증조부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
그리스 낙하산국왕 요로요스 1세 조부
조부는 암살, 백부는 쿠데타·폐위·망명
부친은 패전 책임으로 사형선고 뒤 망명
독일서 공부하다 나치 피해 스코틀랜드로
외가, 독일계 영국 귀족 마운트배튼가
영국 해군장교 2차대전 참전·일본 항복 목격
러시아 할머니, 볼셰비키혁명 때 구사일생
현대사 목격한 증인…왕실 현대화 지켜봐
품위·품격·명예·긍지·의무·책임으로 왕실 중심

2012년 6월 16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 부부가 버킹엄 궁전 앞을 행진하는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이날 여왕 경호부대가 매년 여는 여왕 생일 축하 행진이 진행됐다. 여왕의 실제 생일은 4월 21일이지만 축하 행사는 통상 6월에 진행된다. AP=연합뉴스

2012년 6월 16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 부부가 버킹엄 궁전 앞을 행진하는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이날 여왕 경호부대가 매년 여는 여왕 생일 축하 행진이 진행됐다. 여왕의 실제 생일은 4월 21일이지만 축하 행사는 통상 6월에 진행된다. AP=연합뉴스

필립공과 여왕 부부, 모두 빅토리아 여왕 자손  

‘제국의 시대’의 황혼을 보며 태어난 필립공은 ‘극단의 시대’의 마지막 증언자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어려서 정략결혼 속에 둘러싸여 군주제의 쇠락을 목격했으며, 영국 해군 장교로서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일제 군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냉전이 시작될 무렵 결혼해 영국 왕실의 핵심이 됐다. 이제 광속으로 움직이는 디지털 시대에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은 디지털 기기로 그의 부음을 들었을 것이다.
필립 공은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유럽 왕실의 혼맥의 한복판에서 태어났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에 62년간 군주였던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 재위 1937~1901년)은 4남 5녀의 자녀를 남겼는데 필립공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모두 그 후손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앨리스(1843~1878년)는 독일 헤센 대공가의 루트비히 4세와 결혼해 빅토리아(1863~1950년)를 낳았고, 빅토리아는 헤센 대공가의 방계인 바텐베르크 가문의 루트비히와 결혼해 앨리스(1885~1969년)를 낳았다. 앨리스가 바로 필립공의 어머니다. 앨리스는 그리스 왕자 안드레아스(1882~1944년)와 결혼해 필립을 낳았다. 필립은 빅토리아 여왕 외손녀의 외손주다. 4대손에 해당한다. 직계일 경우 고손에 해당하는 후손이다.

1947년 11월 20일 영국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공이 결혼식을 마치고 버킹엄 궁전의 바로니에서 축하객들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왕족 간 정략 결혼이 일반적이던 시절 이들은 스스로 선택헤 연애 결혼을 했다. AP=연합뉴스

1947년 11월 20일 영국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공이 결혼식을 마치고 버킹엄 궁전의 바로니에서 축하객들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왕족 간 정략 결혼이 일반적이던 시절 이들은 스스로 선택헤 연애 결혼을 했다. AP=연합뉴스

정략결혼 판치는 시대 태어나 연애결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보자. 영국 국왕의 계보다. 빅토리아 여왕의 사후 아들 에드워드 7세(1841~1910년, 재위 1901~1910년)가 국왕에 올랐다. 그 뒤는 빅토리아의 손자 조지 5세(1865~1936년, 재위 1910~1936년)와 증손 조지 6세(1895~1952년, 재위 1936~1952년)가 이었다. (1936년 1~11월 왕위에 올랐다 월리스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으로 양위한 에드워드 8세는 조지 5세의 아들이자 조지 6세의 형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백부다) 엘리자베스 2세는 빅토리아의 고손녀다. 결국 필립공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같은 항렬이다. 이 두 사람은 왕족 간 정략결혼이 기본이던 시절에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필립공이 1921년 태어난 그리스 코르푸 섬의 몬레포스 궁전의 입구. 필립공의 부친인 안드레아스 왕자가 부왕인 요르요소 1세가 암살당한 뒤 물려받은 부동산이다. AP=연합뉴스

필립공이 1921년 태어난 그리스 코르푸 섬의 몬레포스 궁전의 입구. 필립공의 부친인 안드레아스 왕자가 부왕인 요르요소 1세가 암살당한 뒤 물려받은 부동산이다. AP=연합뉴스

그리스의 피는 한 방울도 없는 그리스 왕자

필립공은 1921년 그리스 서부 코르푸 섬(그리스어로는 케르키라)에 있는 부친 소유의 별장에서 태어나면서 ‘덴마크의 그리스의 왕자’가 됐다. 호칭에 ‘그리스’가 있지만, 그에겐 그리스인의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필립공이 1921년 태어난 그리스 코르푸 섬의 몬레포스 궁전의 입구에 그리스어와 영어로 필립공이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알리는 표식이 붙어 있다. AP=연합뉴스

필립공이 1921년 태어난 그리스 코르푸 섬의 몬레포스 궁전의 입구에 그리스어와 영어로 필립공이 이곳에서 태어났음을 알리는 표식이 붙어 있다. AP=연합뉴스

필립공은 덴마크·노르웨이 왕을 배출한 독일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 소속이다. 줄여서 글뤽스부르크 왕가로 불리는 이 가문은 덴마크·노르웨이·아이슬란드의 왕과 슐레스비히홀스타인 공국의 공작을 배출해왔다. 덴마크 혈통인데 그리스의 왕자라니. 거기에는 ‘제국주의 시대’와 ‘민족주의 국가’의 흔적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4월 17일 필립공의 장례식 당시 고인의 관이 영결식이 열린 윈저성의 성조지 예배당으로 운구되는 모습. 관에 덮인 깃발에 필립공 개인 문장의 핵심 부분이 그려져 있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본가인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가, 친가가 왕위를 맡았던 그리스의 푸른 바탕 위 하얀 십자가, 자신의 작위인 에든버러 공작을 나타내는 에든버러의 성 모양 문장, 그리고 외가인 마운트배튼 가문을 상징하는 보라색 두 줄 선이 보인다. 필립공의 가문 내력을 표시한 깃발이다. 관 위에는 필립공의 해군 복무 경력을 나타내는 해군모와 해군도가 놓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고인은 해군 경력을 자랑스러워했다. 운구는 필립공이 명예 사령관을 맡은 해병대의 장병이 맡았다. AP=연합뉴스

지난 4월 17일 필립공의 장례식 당시 고인의 관이 영결식이 열린 윈저성의 성조지 예배당으로 운구되는 모습. 관에 덮인 깃발에 필립공 개인 문장의 핵심 부분이 그려져 있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본가인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가, 친가가 왕위를 맡았던 그리스의 푸른 바탕 위 하얀 십자가, 자신의 작위인 에든버러 공작을 나타내는 에든버러의 성 모양 문장, 그리고 외가인 마운트배튼 가문을 상징하는 보라색 두 줄 선이 보인다. 필립공의 가문 내력을 표시한 깃발이다. 관 위에는 필립공의 해군 복무 경력을 나타내는 해군모와 해군도가 놓여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고인은 해군 경력을 자랑스러워했다. 운구는 필립공이 명예 사령관을 맡은 해병대의 장병이 맡았다. AP=연합뉴스

덴마크 왕실인 독일계 글뤽스부르크 왕가

필립공의 가계를 보면 독일계 글뤽스부르크 왕가의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1818~1906년, 재위 1863~1906년)가 증조부다. 글뤽스부르크 그리스 왕조(1863~1973년)의 첫 국왕인 요르요스 1세(1845~1913년, 재임 1863~1913년)가 할아버지다.
덴마크 왕좌를 차지한 독일인들이 그리스 왕좌까지 확보한 데는 사연이 있다. 1832년 유럽의 영국·프랑스·러시아는 런던회의에서 그리스 왕국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열강은 그리스가 1821년 오스만튀르크에서 독립할 때 지원해 입김이 강했다.

지난 4월 17일 필림공의 장례식 당시 관 위에 고인의 해군 복무 경력을 나타내는 해군모와 군도가 놓여 있다. 필립공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지중해와 인도양, 태평양에서 싸웠고 1945년 9월 일본의 항복식에도 참석했다. 필립공은 일생에 걸쳐 자신의 해군 경력을 자랑스러워했다. AP=연합뉴스

지난 4월 17일 필림공의 장례식 당시 관 위에 고인의 해군 복무 경력을 나타내는 해군모와 군도가 놓여 있다. 필립공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지중해와 인도양, 태평양에서 싸웠고 1945년 9월 일본의 항복식에도 참석했다. 필립공은 일생에 걸쳐 자신의 해군 경력을 자랑스러워했다. AP=연합뉴스

강대국이 그리스에 보낸 ‘낙하산 군주’

당시 독립왕국이던 독일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인 오톤(1815~1867년)을 초대 국왕으로 앉혔다. 17세의 미성년자 국왕은 성년이 되자 절대군주로 변했다. 유럽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국민은 반발하며 봉기했다. 마지못해 1843년 헌법을 승인했지만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자신의 욕망 속에서 열강의 눈치를 봐야 했다. 거기에 국민의 반란 위협까지 받아 좌충우돌했다. 결국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그는 1862년 국민 혁명으로 폐위당하고 고향인 바이에른으로 ‘망명’했다.

필립공의 장례식이 열린 지난 4월 17일 영국 FA컵 준경승전이 열린 영국 런던 북서부 웸블리 구장에서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 팀 선수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1분간의 묵념을 하고 있다. 팀들의 로고와 필립공의 사진이 보인다. AFP=연합뉴스이

필립공의 장례식이 열린 지난 4월 17일 영국 FA컵 준경승전이 열린 영국 런던 북서부 웸블리 구장에서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 팀 선수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1분간의 묵념을 하고 있다. 팀들의 로고와 필립공의 사진이 보인다. AFP=연합뉴스이

조부, 왕위 오르고 러시아 대공녀와 정략결혼

열강은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요르요스 1세를 다시 왕으로 보냈고 그리스인은 국민투표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왕위에 오르면서 종교도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가문의 루터교에서 그리스인들의 종교인 동방정교로 바꿨다. 요로요스 1세는 열강에 의해 왕위에 오른 뒤인 1867년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대공녀(대공의 딸)인 올가 콘스탄니노브나(1851~1926년)와 결혼했다. 올가는 니콜라이 1세 차르의 차남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딸이다. 러시아 차르의 손녀가 그리스 왕비가 됐다. 필립 공의 할머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러시아로 돌아간 올가 왕비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발발하면서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다행히 덴마크 대사관의 도움으로 스위스로 탈출했지만,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1세가 폐위당하면서 갈 곳이 없어졌다. 손자가 잠시 왕위에 오르면서 1920년 그리스로 돌아가 잠시 섭정을 맡기도 했지만, 쿠데타로 다시 망명객이 됐다.

4월 17일 영결식장인 윈저 성 성조지 예배당에 도착한 필립공의 관. 고인의 개인 문장으로 만든 깃발이 관 위에 덮였다; 깃발 왼쪽 아래에 그리스 국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필립공의 본가인 덴마크계 글뤽스부르크 왕가는 1863~1973년 그리스 군주를 맡다가 국민투표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왕위를 반납해야 했다. AP=연합뉴스

4월 17일 영결식장인 윈저 성 성조지 예배당에 도착한 필립공의 관. 고인의 개인 문장으로 만든 깃발이 관 위에 덮였다; 깃발 왼쪽 아래에 그리스 국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필립공의 본가인 덴마크계 글뤽스부르크 왕가는 1863~1973년 그리스 군주를 맡다가 국민투표로 군주제가 폐지되면서 왕위를 반납해야 했다. AP=연합뉴스

필립공 아버지, 패전 책임으로 사형선고 뒤 망명

필립공의 부친 안드레아스는 요르요스 1세의 4남이다. 글뤽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그는 그리스 왕위 계승 순위에 들어갔지만, 너무도 뒷 순번이어서 현실적으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군에서 명예직이 아닌 실제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로서 경력을 쌓았다.
군 장성이던 안드레아스는 민족주의끼리의 충돌인 1919~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 패전 책임으로 1922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영국이 군함을 보내 안드레아스 가족을 데려갔다. 안드레아스의 부인 앨리스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필립공의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망명객으로서 프랑스 남부에서 망명객 생활을 하다 1944년 2차대전 중 호텔에서 쓸쓸히 숨졌다. 어머니 앨리스는 조현병을 앓아 독일 베를린의 요양원에 있다가 영국에 와서 윈저 성에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2016년 11월 10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서 손자인 해리 왕자(왼쪽)와 함께 서잇는 필립공. 가슴에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빨간 개양귀비 모양의 조화를 달고 있다. 복장은 영국 해군 정장이다. 영국은 매년 1차대전 종전기념일인 11월 11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말에 추모 행사를 연다. 로이터=연합뉴스

2016년 11월 10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서 손자인 해리 왕자(왼쪽)와 함께 서잇는 필립공. 가슴에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빨간 개양귀비 모양의 조화를 달고 있다. 복장은 영국 해군 정장이다. 영국은 매년 1차대전 종전기념일인 11월 11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말에 추모 행사를 연다. 로이터=연합뉴스

독일서 학교 다녀…나치 집권 뒤 영국행  

필립공은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로 가서 파리의 미국인 학교에 다니다 1930년 외가가 있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다 독일 서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지역에 있는 슐로스 살렘 학교로 옮겼다. 친척이 운영해 학비를 적게 주고 다닐 수 있다는 이점 때문으로 알려졌다. 그의 학창 시절 아버지는 프랑스 남부 모나코에 머물렀다. 누나 4명은 독일 귀족과 결혼에 독일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마음의 병으로 베를린의 요양원에서 지내다 런던으로 건너갔다. 필립공은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유대인인 슐로스 살렘의 창립자 쿠르트 한은 영국 스코틀랜드로 옮겨 고든스타운 학교를 설립했다. 슐로스 살렘에서 2학기를 마친 필립공은 고든스타운에서 중등학교(중고교)를 마쳤다. 고든스타운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필립공은 큰 변고를 줄이어 겪었다.

생전의 필립공이 2017년 8월 2일 버킹엄 궁전 앞에서 영국 해병대를 사열하다 실크 모자에 손을 올리고 있다. 필립공은 영국 해병대 명예 사령관이다. AP=연합뉴스

생전의 필립공이 2017년 8월 2일 버킹엄 궁전 앞에서 영국 해병대를 사열하다 실크 모자에 손을 올리고 있다. 필립공은 영국 해병대 명예 사령관이다. AP=연합뉴스

후견인인 누나 부부와 큰외삼촌 잃어

1937년 벨기에 오스텐트 비행기 추락 사고로 누나인 세실과 매부인 헤센 공작 게오르크, 두 조카와 갓난아기, 그리고 누나의 시어머니까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누나와 매부는 나치당원으로 알려졌다. 이듬해인 1938년에는 자신의 보호자이던 큰외삼촌인 조지 마운트배튼 후작이 45세의 나이로 골수암으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운트배튼가의 막내이자 작은 삼촌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백작이 필립공을 돌볼 수밖에 없게 됐다. 1939년 필립공은 작은 삼촌의 영향을 받았는지 영국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학기를 마치고 어머니가 잠시 머물던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했는데 그리스 국왕인 사촌 요르요스 2세도 그에게 영국 해군에서 경력을 쌓으라고 충고했다.

2015년 11월 11일 벨기에의 이프레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필립공이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필립공은 이날 1차대전 최전선이던 이곳 플랑드르 지방에서 종전 70주년을 상징하는 모래 주머니 70개를 만들게 해 영국에 들고왔다. 이 모래주머니는 런던의 플랑드르 전선 추모 공원으로 옮겨졌다. AP=연합뉴스

2015년 11월 11일 벨기에의 이프레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필립공이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필립공은 이날 1차대전 최전선이던 이곳 플랑드르 지방에서 종전 70주년을 상징하는 모래 주머니 70개를 만들게 해 영국에 들고왔다. 이 모래주머니는 런던의 플랑드르 전선 추모 공원으로 옮겨졌다. AP=연합뉴스

해군 장교로 2차대전 참전…일본 항복 지켜봐

그리스 왕족이지만 그가 그리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필립공은 영국 해군사관학교를 최우수 생도로 졸업하고 1940년 1월 해군의 일원이 됐다. 필립공은 평생 해군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곧이어 2차 세계대전이 달아오르면서 필립공은 영국 해군 장교로서 지중해에서 크레타 전투, 시칠리아 상륙작전 등에 참전하며 나치와 파시스트와 싸웠다. 그 뒤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옮겨 오키나와 전투에도 참전해 일본 군국주의자들과도 싸웠다. 함상에서 종전을 맞은 필립공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 함상에서 진행된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식도 목격했다.

1951년 8월 1일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림공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찰스 왕자, 필립공,, 앤 공주, 엘리자베스. AP=연합뉴스 F

1951년 8월 1일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림공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찰스 왕자, 필립공,, 앤 공주, 엘리자베스. AP=연합뉴스 F

외가인 바텐베르크 가문 영향으로 해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외가인 독일의 바텐베르크 가문이다. 바텐베르크는 헤센 대공 루트비히 2세의 3남인 알렉산데르가 군주 혈통이 아닌 폴란드 장군의 딸인 율리아와 귀천상혼(신분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하면서 상속권을 잃게 되자 별도로 만든 가문이다.
알렉센데르의 아들인 루트비히 폰 바텐베르크(1854~1921년)는 독일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의 사촌이다. 사촌의 부인이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앨리스 공주다.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인 독일 작세-코부르크-고타 공작과도 먼 친척으로 친분이 두터웠다. 이런 인연으로 루트비히는 14살 때인 1868년 영국에 귀화해 해군에 들어갔다.
영국인 루이스가 된 루트비히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인 헤센 공녀(공작의 딸)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빅토리아는 외가인 영국 왕실의 거처인 윈저 성에서 딸인 앨리스를 출산했다.
그는 영국 해군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해군참모총장 격인 해군경까지 맡았다. 하지만 1차 대전이 벌어지면서 영국에 반독일 감정이 확산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1977년 6월 7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25주년 행사를 런던 길드홀(시청)에서 마치고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AP=연합뉴스

1977년 6월 7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25주년 행사를 런던 길드홀(시청)에서 마치고 마차를 타고 버킹엄궁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AP=연합뉴스

반독감정 퍼지자 영국식 마운트배튼으로  

반독 감정이 퍼지자 역시 독일계인 영국 왕실은 신속히 진화에 나섰다.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인 앨버트(독일어 알베르트)의 독일 가문 이름을 따서 작세-코부르크-고타 가문으로 부르던 영국 왕실은 왕실 거처의 하나인 윈저성에서 딴 윈저로 왕가 이름을 바꿨다. 나중에 여왕이 또 나와도 왕실 이름을 부계에 맞춰 고치지 않고 계속 윈저로 부르기로 했다.
당시 영국 국왕인 조지 5세는 자국에 정착한 독일계 친척들에게도 같은 조치를 요구했다. 영국의 바텐베르크 가문은 1917년 바텐베르크의 영어 해석에 해당하는 마운트배튼으로 이름을 바꿨다. 베르크는 산이란 의미이고, 바텐은 영어식으로 배튼으로 읽었다. 독일에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루이스 알렉산더 마운트배튼이 된 루트비히에게 조지 5세는 밀퍼드 헤이븐 후작의 작위를 내렸다. 영국 귀족가문 마운트배튼 가문의 밀퍼드 헤이븐 후작이 된 루이스 후작이 바로 필립공의 외할아버지다.
필립공은 왕가의 얽히고설킨 혼맥 덕분에 영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 이전에도 실제로 영국인이었던 셈이다. 필립공은 영국에 정착하면서 외가의 성인 마운트배튼을 사용했다.
루이스의 막내아들인 루이스(아버지와 이름이 같으며 중간 이름인 프랜시스로 구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 해군에 들어갔다. 바로 루이스 마운트배튼(1900~1979년) 백작이다. 필립공의 어머니 앨리스의 막내 남동생이니 외삼촌이다. 마운트배튼 백작은 1913~1965년 영국 해군에 복무하면서 2차대전에 참전했다. 최종 계급은 해군 원수였다.

1953년 11월 25일 버뮤다 섬을 방문한 일레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 필림공은 해군모를 쓰고 해군 복장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53년 11월 25일 버뮤다 섬을 방문한 일레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공. 필림공은 해군모를 쓰고 해군 복장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마지막 인도 총독…IRA 테러에 희생

1955~1959년 해군참모총장 격인 해군경을 맡았고, 1947~1948년 마지막 인도 총독을 지냈다. 영국 귀족으로서 1946~1979년 상원의원도 맡았다. 그는 1979년 8월 아일랜드에서 휴가를 보내다 북아일랜드의 분리를 외치며 무장 투쟁을 벌이던 아일랜드공화국 임시파(PIRA)의 폭탄 테러로 숨졌다. PIRA는 1920년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펼치던 단체와는 다른, 북아일랜드 분리를 요구하며 테러를 벌이던 단체다. 영국을 포함해 대부분의  미디어에선 둘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IRA로 부른다.
마운트 배튼 백작의 장례식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세계 지도자가 매시지를 보내 그를 추도했다. 아릴랜드 민족주의라는 대의를 추구한답시고 인명을 경시하고 폭력을 일삼던 IRA는 궁지에 몰렸다.

1965년 3월 25일 그리스를 방문한 필립공(가운데)이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과 함께 아테네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필립공의 조카로 1973젼 그리스가 국민투표로 군주제를 폐지하면서 그리스의 마지막 국왕이 됐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올해 80세로 오랜 망명 끝에 2015년 그리스로 귀국했다. AP=연합뉴스

1965년 3월 25일 그리스를 방문한 필립공(가운데)이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과 함께 아테네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필립공의 조카로 1973젼 그리스가 국민투표로 군주제를 폐지하면서 그리스의 마지막 국왕이 됐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올해 80세로 오랜 망명 끝에 2015년 그리스로 귀국했다. AP=연합뉴스

암살·분열·파당주의의 그리스 현대사  

필립공의 가족사에는 특히 그리스의 근현대사가 커다랗게 자리 잡았다. 근대 민족국가 그리스의 역사는 1821년 시작됐다.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봉기했다. 임시정부 선포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은 요안니스 안토니오스 카포디스트리아스(1776~1831년)다. 그도 코르푸 섬 출신이다. 이 섬은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반도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충지다. 이탈리아 동부의 아드리아해에서 그리스 서부 이오니아해를 거쳐 지중해의 중심부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랫동안 지배했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의사였는데 러시아가 일시 코르푸를 점령하자 러시아의 외교관이 돼 장관까지 올랐다. 그러다 그리스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초대 대통령이 됐다. 이런 경력보다 더 독특한 것이 그의 최후다. 불화를 일으킨 또 다른 독립운동가 페트로스 마브로미할리스(1765~1848)를 투옥하자 그의 동생과 아들이 가문의 명예를 지킨다며 초대 대통령을 암살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비잔틴 제국이 무너진 뒤 400년 가까운 튀르크의 지배를 끝내고 처음 들어선 그리스 독립 정부의 초대원수는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의 뿌리 깊은 분열주의·파당주의·지역주의에 따른 불행으로 보기도 한다.

버킹엄궁이 공개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의 비공식 사진. 2003년 스코틀랜드에서 부부의 막내아들 에드워드의 부인인 소피가 찍었다. AP=연합뉴스

버킹엄궁이 공개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의 비공식 사진. 2003년 스코틀랜드에서 부부의 막내아들 에드워드의 부인인 소피가 찍었다. AP=연합뉴스

열강, 독립한 그리스에 외국인 군주 보내

그리스는 독립에 도움을 준 유럽 열강의 압력으로 군주제를 채택하고 외국인 국왕을 맞았는데 불행에 불행을 거듭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열강인 영국·프랑스·러시아는 1832년 런던회의에서 그리스 왕국을 세우기로 했다. 당시 독립왕국였던 독일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인 오톤(1815~1867년)을 초대 국왕으로 앉혔다. 17세의 미성년자 국왕은 성년이 되자 절대군주로 변했다. 유럽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국민은 반발하며 봉기했다. 마지못해 1843년 헌법을 승인했지만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자신의 욕망 속에서 열강의 눈치를 봐야 했다. 거기에 국민의 반란 위협까지 받아 좌충우돌했다. 결국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그는 1862년 국민 혁명으로 폐위당하고 고향인 바이에른으로 ‘망명’했다.
열강은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요르요스 1세(1845~1913년, 재위 1863~1913년)를 왕으로 보냈고 그리스인은 국민투표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요로요스 1세가 바로 필립공의 할아버지다. 왕위에 오르면서 종교도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가문의 루터교에서 그리스인들의 종교인 그리스정교로 바꿨다. 요로요스 1세는 열강에 의해 왕위에 오른 뒤인 1867년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여성과 결혼했다. 필립공의 부친 안드레아스는 요르요스 1세의 4남이다. 그리스 왕위 계승 순위를 잡아주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없었다.

2018년 10월 12일 여왕과 필립공이 윈저성의 성조지 성당 앞에서 손녀인 유제니 공주 결혼식에 참석해 신랑신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유제니 공주는 부부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의 둘째 딸이다. AFP=연합뉴스

2018년 10월 12일 여왕과 필립공이 윈저성의 성조지 성당 앞에서 손녀인 유제니 공주 결혼식에 참석해 신랑신부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유제니 공주는 부부의 차남인 앤드루 왕자의 둘째 딸이다. AFP=연합뉴스

민족주의·대립·쿠데타…그리스 정치의 형식

글뤽스부르크 왕가는 열강의 도움으로 그리스 왕위를 차지했지만, 그리스인을 다스리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요르요스 1세는 오스만튀르크와의 1차 발칸전쟁에 이어 불가리아와의 2차 발칸전쟁으로 영토를 넓히는 데 몰두했다. 그 와중에 불가리아의 민족주의와 충돌해  비밀 결사단에 의해 1913년 암살당했다. 그리스 민족주의와 슬라브 민족주의의 충돌이다.
요르요스 1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1세(1868~1923년, 재위 1913~1917, 1920~1922년)가 그 뒤를 이어 국왕에 올랐는데, 필립 공의 백부다. 콘스탄티노스 1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둘러싸고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와 갈등하며 '거대한 국론 분열'을 불렀다. 왕당파와 총리파의 격렬한 갈등은 1917년 쿠데타로 끝났다. 국왕은 폐위되고 망명했다. 쿠데타 세력은 콘스탄티노스 1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1893~1920년, 재위 1917~1920년)를 허수아비 왕에 올려놓고 다른 왕족은 추방했다. 필립공의 부친인 안드레아스 왕자도 일시 추방당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애완용 원숭이에 물려 사망하면서 폐위됐던 콘스탄티노스 1세는 국민투표 끝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4월 17일 필립공의 장례식에서 고인의 네 자녀가 도열해 있다. 왼쪽부터 차남 앤드루 왕자, 삼남 에드워드 왕자, 장남 찰스 왕세자, 외동딸 앤 공주. AP=연합뉴스

4월 17일 필립공의 장례식에서 고인의 네 자녀가 도열해 있다. 왼쪽부터 차남 앤드루 왕자, 삼남 에드워드 왕자, 장남 찰스 왕세자, 외동딸 앤 공주. AP=연합뉴스

폐위-복귀 오가다 국민투표로 군주제 폐지

하지만 그리스는 1차대전 뒤인 1919년 세브르 조약으로 터키의 일부 영토를 얻게 되자 이를 점령하고 영토를 더 넓혀보려고 1919~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을 벌였다. 그리스 민족주의가 터키 민족주의와 부딪힌 전쟁이다.
그리스군은 무리하게 소아시아 반도의 중심부인 앙카라로 진격하다 나중에 터키의 국부가 되는 케말 파샤의 군대에 궤멸했다. 터키는 열강과 재협상해 1923년 로잔 조약을 맺고 지금의 영토를 지킬 수 있었다.
패전한 그리스에선 1922년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콘스탄티노스 1세가 다시 폐위돼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그리스는 국론분열에 이어 폐위·망명의 반복으로 얼룩졌다. 콘스탄티노스1세의 아들인 요르요스 2세(1890~1947년, 재위 1922~1924년, 1935~1947년)가 왕위에 올랐지만 1923년 왕당파의 쿠데타가 실패한 이듬해에 폐위되고 망명했다. 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가는 1935년 국민투표로 그리스 왕좌를 다시 차지했지만 결국 여러 차례의 쿠데타와 반대 세력의 쿠데타, 쿠데타 미수 등 복잡한 정치 상황을 겪었다. 결국 1973년 국민투표에서 군주제 폐지가 결정되면서 몰락했다. 국민투표로 들어선 군주제는 권위를 잃고 현실 정치의 장식품 노릇을 하다 국민투표를 거쳐 사라졌다.

지난 4월 17일 영국 근위 기마 포병대가 필립공 장례식 조포 발사를 위해 윈저성으로 이어지는 '롱 워크'를 지나고 있다. 윈저 성 주변의 풀밭 사이에 난 긴 길이다. AP=연합뉴스

지난 4월 17일 영국 근위 기마 포병대가 필립공 장례식 조포 발사를 위해 윈저성으로 이어지는 '롱 워크'를 지나고 있다. 윈저 성 주변의 풀밭 사이에 난 긴 길이다. AP=연합뉴스

필립공 장례식, 역사와 정체성 반영

4월 17일 윈저 성에서 치러진 장례식에서 필립공의 관은 개인 문장의 핵심 부분으로 만든 깃발에 덮였다. 본가인 덴마크 글뤽스부르크 가문을 상징하는 네 마리 사자, 친가인 그리스를 상징하는 푸른색 바탕의 흰 십자가, 외가인 마운트배튼 가문을 상징하는 보라색 두 줄, 그리고 자신이 영국 여왕 부군으로서 받은 작위인 에든버러 공을 상징하는 성 모양의 에든버러 문장으로 이뤄졌다. 필립공의 내력과 정체성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깃발이다.

부친인 필립공의 장례식에 참석한 찰스 왕세자. 국왕으로 즉위하면 필립공의 본가인 글뤽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받은 첫 영국 군주가 된다. 영국 왕가의 이름은 1차대전 중이던 1917년 독일식인 작세-코부르크-고타에서 영국식인 윈저로 바뀐 뒤 여왕의 자녀가 즉위해도 그 부군의 성으로 왕가 이름을 바꾸지 않고 계속 윈저 왕가로 불린다. AP=연합뉴스

부친인 필립공의 장례식에 참석한 찰스 왕세자. 국왕으로 즉위하면 필립공의 본가인 글뤽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받은 첫 영국 군주가 된다. 영국 왕가의 이름은 1차대전 중이던 1917년 독일식인 작세-코부르크-고타에서 영국식인 윈저로 바뀐 뒤 여왕의 자녀가 즉위해도 그 부군의 성으로 왕가 이름을 바꾸지 않고 계속 윈저 왕가로 불린다. AP=연합뉴스

관 위에는 해군모와 군도가 놓였다. 영국 해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도쿄만에서 1945년 9월 일본의 항복식을 직접 목격했다. 그가 살아온 삶이 농축된 깃발과 해군모, 군도였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4월 17일 윈저성에서 열린 남편 필립공의 장례식에 참석해 왕실 벤틀리를 타고 운구 차량을 뒤따르고 있다. AP=연합뉴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4월 17일 윈저성에서 열린 남편 필립공의 장례식에 참석해 왕실 벤틀리를 타고 운구 차량을 뒤따르고 있다. AP=연합뉴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살아간 ‘어른’

필립공은 인생은 여왕 부군으로만 산 게 아니었다. 그가 살았던 100년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이겨낸 용기 있는 시간이었다. 제국주의와 군주제의 황혼기에 태어나고 자란 뒤 혼란의 그리스, 볼셰비키 혁명, 나치즘·파시즘·군국주의로 인한 세계대전, 그리고 냉전까지 겪었다.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모 세대, 조부모 세대와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함께 견딘 ‘어른’이었다.

4월 17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성에서 필립공을 기리는 조포를 발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4월 17일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성에서 필립공을 기리는 조포를 발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러면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공적 임무의 균형을 유지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품위·품격·명예·긍지·의무·책임 같은 단어들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이었다. 자신은 외국 왕족끼리 결혼했지만 자녀와 손주들은 모두 영어권인 영국인이나 미국인 귀족이나 평민과 연애결혼을 했다. 누구도 왕실 혼인을 하지 않았으며, 정략 결혼은 없었다. 왕실 현대화의 핵심은 결혼의 현대화였다. 3남 1녀의 자녀 중 막내 에드워드 왕자를 제외한 전원이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필립공은 73년간 그런 가족을 이끌었다.

필립공이 장증손인 조지 왕자와 함께 마차에 탄 장면. 필립공의 장손인 윌리엄 왕자 부부가 제공한 왕실의 비공식 사진으로 촬영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지는 찰스 왕세자의 장남인 윌리엄의 장남으로 영국 왕위 계승순위 3위다. AP=연합뉴스

필립공이 장증손인 조지 왕자와 함께 마차에 탄 장면. 필립공의 장손인 윌리엄 왕자 부부가 제공한 왕실의 비공식 사진으로 촬영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지는 찰스 왕세자의 장남인 윌리엄의 장남으로 영국 왕위 계승순위 3위다. AP=연합뉴스

그 긴 세월 동안 세상은 변했고, 왕실도 함께 변화의 속도를 맞췄다. 그 중심에 필립공이 있었다. 여왕 부군이었지만 그는 언제나 능동적인 왕실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심지어 군주제 지지 여부까지 떠나 인간 필립을 추모하는 이유일 것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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