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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6분의 1 죽음의 탈출…北처지 연상시키는 ‘비극의 나라’[알지RG]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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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지난해말 베네수엘라 북동부 수크레주 구이리아 앞바다. 베네수엘라인들을 태우고 11km 떨어진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로 향하던 배가 도중에 난파됐습니다. 30구의 시신이 해상에서 발견됐고, 사망자 가운데는 여성과 어린이도 있었습니다. 8명 정원의 배에 41명을 태우고 운항하다 빚어진 일입니다. 숨진 이들 중엔 이민자는 물론 이웃 나라로 밀가루, 쌀, 기름 등을 구하러 가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베네수엘라에선 생필품마저 사기 어려워지면서입니다.

카라카스의 한 상점에서 2018년 8월 2.4㎏짜리 생닭 한 마리가 1460만 볼리바르(약 2500원)에 거래됐다. 베네수엘라의 초인플레이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카라카스의 한 상점에서 2018년 8월 2.4㎏짜리 생닭 한 마리가 1460만 볼리바르(약 2500원)에 거래됐다. 베네수엘라의 초인플레이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이다. [로이터=연합뉴스]

2018년과 2019년에도 비슷한 사고로 100여명이 실종됐습니다. 그럼에도 이 위험한 항해는 계속됩니다. 트리니다드 토바고로 이주한 이들만 4만명이 넘습니다.

지난 2월에는 혹한 속에서 미-멕시코 국경을 건너던 베네수엘라 여성이 얼음장 같은 강물에 갇혀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위험에도 최근 미국 국경지대에는 베네수엘라인을 포함한 난민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반(反) 이민정책을 펼치던 트럼프 행정부와 달리 바이든 정부가 이민자에게 우호적일 것이라는 실낱같은 기대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2018년 8월 에콰도르로 떠나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베네수엘라인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콜롬비아, 에콰도르, 브라질 등으로 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2018년 8월 에콰도르로 떠나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베네수엘라인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콜롬비아, 에콰도르, 브라질 등으로 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렇게 목숨까지 걸면서 베네수엘라를 떠난 이들은 2015년 이후 약 500만 명에 달합니다. 현재 인구가 3000만명에 못 미치는 걸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웃 콜롬비아로만 180만명이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문제는 이같은 '생존을 위한 엑소더스(exodus)'가 멈출 기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난국을 초래한 정치·경제의 혼란이 계속되면서죠. 미국 외교협회(CFR)는 올해 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 이슈 중 위험도가 가장 높은 '1등급'에 베네수엘라 난민 폭증을 포함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가진 축복받은 땅 베네수엘라, 왜 비극은 멈출 기미가 없을까요.

원유로 지탱한 포퓰리즘…금융위기와 함께 붕괴

유엔총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 [중앙포토]

유엔총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 [중앙포토]

널리 알려져 있듯 현재 베네수엘라가 겪는 혼란이 잉태된 건 1998년부터 집권한 우고 차베스(Hugo Chavez) 정권에서였습니다. 군인 출신인 차베스는 집권 후 신헌법을 제정해 의회와 권력기관을 장악하며 기존 엘리트의 기득권을 박탈했습니다. 사회복지가 확대되며 극단적 빈곤에서 벗어난 하층민과 정치 참여 기회가 확대된 군인들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석유자원에 대한 기득권을 상실한 전통적 과두세력이 반차베스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차베스는 포퓰리즘에 기초해 경제정책을 펼쳤습니다. 국유화한 석유산업의 수익을 복지정책에 쏟아부었는데요. 때마침 원유값이 급등하며 차베스 체제는 탄력을 받습니다. 2008년 배럴당 150달러까지 상승한 원유가격에 2000~2012년 동안 약 780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210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던 1987~1999년에 비하면 2.5배나 급증한 것인데요. 이 수익을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소득층 보조금 지급에 사용했습니다.

식량을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서있는 베네수엘라 사람들. [AP=연합뉴스]

식량을 사기 위해 줄을 길게 서있는 베네수엘라 사람들. [AP=연합뉴스]

단기적으로는 큰 효과가 있었는데요. 빈곤과 문맹률이 낮아지고 소득 불평등은 빠르게 개선되었습니다. 지니계수도 1999년 0.498에서 2011년 0.397로 크게 낮아졌습니다. 하지만 포퓰리즘으로 구조적인 문제까지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실업률이나 물가상승률, 유아 사망률 등은 남미 최고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니까요. 그나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석유 가격이 급락하자 화려한 포장은 순식간에 벗겨지고, 허약한 경제구조의 민낯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돈 찍어 구멍난 재정 충당…초인플레 악순환

당장 국가를 지탱하던 석유 산업이 붕괴했습니다. 국영 석유회사 PDVSA의 방만하고 부실한 경영, 투자 부족의 후유증이 드러나며 베네수엘라는 국내에서 쓸 기름조차 구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을 맞습니다. 여기에 미국의 제재까지 가해지며 결정타가 가해집니다. 한때 하루 320만 배럴에 달하던 산유량은 지난해에는 불과 10~20만 배럴까지 떨어집니다.

지난 16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은행에서 한 여성이 50만 볼리바르 신권 지폐를 인출해 들어 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6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한 은행에서 한 여성이 50만 볼리바르 신권 지폐를 인출해 들어 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원유 하나로 버티던 경제가 배겨낼 수가 없겠죠. 경제는 지난 7년간 침체를 겪습니다. 대표적인 후유증은 어느덧 베네수엘라를 상징하는 말이 돼버린 '초(超)인플레이션' 입니다. 구멍 난 재정을 화폐를 찍어 메우면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최고액권이 5만 볼리바르인데 커피 한 잔 값이 280만 볼리바르까지 치솟았습니다.

커피 한잔에 최고액권 56장이 필요한 셈이죠. 견디지 못한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지난 8일 기존 최고액권의 20배인 100만 볼리바르 지폐를 찍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100만 볼리바르의 가치는 미 달러로 53센트, 우리 돈으론 600원에 불과하니 미봉책일 뿐이죠.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내 전체 거래의 66%가 외화로 이뤄진다고 합니다.

두 명의 대통령 이어 두 명의 국회 의장…정치 혼란 점입가경

지난 1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카라카스의 대법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카라카스의 대법원에서 연설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곤두박질치는 경제와 함께 정치적 혼란도 가중됩니다. 차베스 대통령이 암 투병 끝에 숨을 거두면서 2013년에 대선을 치르게 됩니다. 차베스가 지명한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Nicolas Maduro)가 어렵게 승리했지만, 야당이 부정 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불복하면서 정치적 혼란은 심화했습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유가 하락과 포퓰리즘 정책으로 누적된 성장률 둔화, 물가상승, 치안 불안 그리고 생필품 부족 등 총체적 혼란에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는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마두로는 2018년 5월 실시한 대선에서 68%의 지지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야권은 피선거권 박탈·수감·가택 연금 등으로 유력 후보들이 출마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거가 치러졌고 부정투표까지 벌어졌다며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도 마두로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야권 인사인 국회의장 후안 과이도(Juan Guaido)가 2019년 1월 자신이 임시 대통령임을 선언했습니다. 한 나라에 대통령이 두 명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지난 2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앞에서 열린 청년절 행사에 참석한 마두로 대통령 지지자들. [AP=연합뉴스]

지난 2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앞에서 열린 청년절 행사에 참석한 마두로 대통령 지지자들. [AP=연합뉴스]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 등 50개국 이상이 과이도를 지지했지만. 중국과 러시아, 이란, 쿠바, 멕시코 등이 마두로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미국은 마두로 정권의 퇴출을 위해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표명해왔는데요. 외교적인 고립과 경제제재를 통해 마두로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중 경쟁은 베네수엘라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제재를 가하는 미국에 맞서 중국은 베네수엘라와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나섰습니다. 중남미 진출 교두보를 마련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입니다.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헌법을 손에 들고 자신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언하며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헌법을 손에 들고 자신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언하며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런 복잡한 사정에 상황은 더 악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에는 친 마두로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의 의사당 출입을 막은 채 과이도를 대체할 새로운 국회의장을 뽑았습니다. 하지만 야권은 이를 인정하지 하지 않고 따로 모여 과이도를 재선임했습니다. 두 명의 대통령도 모자라 두 명의 국회의장이 생긴 것입니다.

"효과적인 제재" 들고 나선 바이든 행정부

바이든 행정부의 고심도 깊어지는 모양새입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제재 일변도 정책이 중국의 입지를 넓히고 난민을 늘려놓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입니다. 얼마전 과이도와 통화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도 “보다 ‘효과적인’ 제재를 통해 베네수엘라 일반 국민에게 미치는 사회ㆍ경제적 악영향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마두로 정권에 대한 제재는 이어가는 대신 인도주의적 지원을 고려하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로이터는 백악관 소식통을 인용해 "마두로가 야권(과이도 측)과 신뢰에 기반한 조치를 통해 진지한 협상을 할 준비가 돼 있다는 신호를 보인다면 제재 완화를 검토할 것"이라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11월 중남미 순방에 나선 김영남 당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왼쪽)이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018년 11월 중남미 순방에 나선 김영남 당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왼쪽)이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국가가 있습니다. 바로 북한인데요. 산업 전반의 생산량 감소, 경제 제재, 외화 부족, 암시장 환율 급등, 물자 부족, 전력수급 불안 등 경제난에 고통을 겪는 북한 주민들이 처한 현실이 베네수엘라와 겹쳐 보입니다. 미·중 갈등이란 지정학적 전장이 된 것도 비슷한데요. 다른 점은 핵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의 존재일 것입니다.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리뷰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현지 보도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어떤 카드를 꺼내 들지 주목됩니다.

※ '알지RG'는 '알차고 지혜롭게 담아낸 진짜 국제뉴스(Real Global news)'라는 의미를 담은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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