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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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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

1422년, 세종 4년 10월 8일의 일이다. 지금으로 치면 건의문 한장이 세종의 책상에 올라왔다. 계를 올린 곳은 예조. 국가 의례와 학문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현재의 광화문 거리에 있던 정부 부처였다. 내용인즉슨 이랬다. “성균관(成均館)의 생원과 학당의 생도들이 휴가가 없어 어버이를 뵙지도, 옷을 세탁하지도 못하니 매월 초 8일과 23일에 휴가를 달라”는 것이었다. 세종은 토를 달지 않고 예조의 건의를 바로 받아들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휴가제도는 세종 때 생긴 것들이 많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관노의 산전 휴가를 만든 것도 그였다.

관에서 일하던 노비가 아기를 낳으면 100일의 출산휴가를 준 데 이어 “산기가 임박해 복무하게 했다가 몸이 지치면 집에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으니 1개월간 복무를 면해주자”(1430년)고 제안했다. 3년 뒤엔 아내가 출산하면 ‘남편 구실을 해야 한다’는 어명과 함께 노비에게도 30일간 남성 육아휴직제도를 만들었다. 세종의 다양한 ‘휴가 복지’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는데, 먼 북방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을 위해선 열흘간의 결혼 휴가를 부여했고, 부모나 조부모상(喪)을 당하면 고향 집 거리까지 따져 다녀올 수 있도록 100일 휴가를 줬다.

휴가제가 널리 퍼지면서 골치 아픈 일도 생겨났다. 세종의 조카 순성군 이개가 1447년 겨울, 진주에 다녀온다며 휴가를 냈다. 해가 바뀌기 전에 돌아오겠다던 이개가 명령을 어기고 돌아오지 않자, 왕실 비위 감찰 등을 담당하던 부서인 종부시(宗簿寺)가 발끈해 상소를 올렸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조카를 그 자리에서 파직(罷職)했다.

6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요즘, 새로운 휴가가 생겨날 기세다. ‘백신 휴가’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신풍경이다. 백신을 맞고 발열, 근육통 등을 호소하는 접종자들이 생기자 정부가 접종 독려 차원에서 백신 휴가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유급휴가냐, 무급휴가냐를 놓고 고심하고 있지만 정작 배려해야 할 것은 비정규직, 프리랜서, 특수형태 근로 종사자와 같은 근로기준법 적용에서 비켜나 있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한파로 생존 위기에 내몰린 이들에게 또 한 번의 설움을 주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김현예 내셔널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