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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지막 길 편하고 품위있게] 제도 허술 … 호스피스 관련 법조차 없어

중앙일보

입력

서울대병원은 최근 말기 암 환자 108명을 대상으로 의료 이용 실태를 조사했다. 놀랍게도 35명이 '어떤 치료도 받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세 명 중 한 명꼴이었다. 이 병원 혈액종양내과 허대석 교수는 "이들은 상상도 못할 끔찍한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라며 "적어도 통증 완화 치료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했다. 상당수 말기 암 환자는 이렇게 방치된다.

집이나 시설에서 편안하게 임종하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센터도 턱없이 부족하다. 통증 조절 치료나 임종실 관련 제도 역시 극히 부실한 상태다. 품위 있는 죽음은 우리에게 '먼 나라' 얘기인 것이다.

◆ 호스피스는 '그림의 떡'=말기 자궁암 환자인 윤모(49)씨. 그는 입원치료를 거부하고 집에서 보내고 있다. 오랜 투병 생활에 지쳐 병원 근처에는 얼씬하기도 싫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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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호스피스. 환자가 집이나 시설에서 전문 간호사의 관리를 받는 서비스 형태다. 전국의 호스피스센터는 74곳. 이 중 인력과 시설을 제대로 갖춘 곳은 49개소에 불과하다. 하지만 윤씨가 사는 충북 청주에는 한 곳도 없다. 그래서 한달에 서너번 경기도 일산의 국립암센터에 가 통증 치료를 받고 있다.

호스피스센터는 지방.농촌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부족하다. 국립암센터 윤영호 박사는 "서울에서 호스피스를 운영 중인 의료기관은 강남성모병원.성바오로병원뿐이고 가정 호스피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도 이화여대.연세대.모현호스피스센터 등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호스피스 서비스를 제때 받기가 쉽지 않다. 강남성모병원 호스피스센터의 경우 입원하려면 7~10일을 기다려야 한다.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말기 환자에게 매우 긴 시간이다.

국내에는 호스피스 관련 법이나 제도가 없다. 관련 서비스는 건강보험 적용 대상도 아니다. 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으려면 한달 평균 120만원가량 든다. 집에서 서비스를 받는 가정호스피스를 이용하면 하루 1만5000원(교통비 포함)이 든다. 병마와 싸우는 과정에서 재산을 다 쓴 환자나 그 가족에겐 이 비용도 부담스럽다.

◆ 임종실도 턱없이 부족=최근 서울대병원 일반병동에서 한 암환자가 숨졌다. 숨지기 직전 의료진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가족들이 울부짖었다. 이 환자가 죽은 뒤 병동 전체가 공포와 우울증을 겪었다. 다른 환자와 가족들이 그의 처참한 말로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다.

같은 병실의 다른 암환자 가족은 "그 환자가 숨진 뒤 병실에서 일주일 이상 대화가 사라졌다"고 했다. 이 병원 김미라 간호사는 "나이 든 환자들은 대부분 집에서 임종을 맞고 싶어한다"며 "하지만 자신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족을 마지막까지 고생시키기 싫어 병원에 남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선 임종실을 따로 설치해놓고 있지만 국내 병원들은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별 관심이 없다. 서울 강남성모병원.보훈병원.분당 보바스기념병원 등 몇 곳에만 설치돼 있다. 보바스기념병원 곽혜련 간호사는 "임종실 이용자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숨진다"고 말했다.

◆ 통증 관리가 안 된다=말기 암환자는 80~90%가 통증에 시달린다. 특히 유방암.전립선암.폐암 등이 뼈로 전이되거나 신경을 건드릴 경우 통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하다. 서울대병원 약제부 최정윤 약사는 "이들에게 모르핀.옥시코돈.펜타닐 등 마약성 진통제를 잘 쓰면 70~90%는 통증에서 해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통증 치료를 가로막는 요인들이 많다.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엄격한 관리규정 때문에 동네의원들은 거의 취급하지 않는다. 경기도 용인의 한 암환자는 "동네에서 마약성 진통제 처방을 못받아 119 구급차에 실려 서울의 모 대학병원까지 가곤 한다"고 했다. 환자가 직접 찾아와 처방을 받도록 돼 있는 의료법 규정도 문제다.

마약성 진통제 중 파스처럼 붙이는 패치제(50㎍)의 경우 효과가 3일 지속된다는 이유로 3일에 한 개만 보험으로 인정하고 있다. 환자의 통증이 심해져 이보다 많이 써야 할 경우 나머지는 전액 환자가 부담해야 한다. 우리의 1인당 마약성 진통제 사용량은 선진국의 10%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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