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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는 자비출간…'열린시학 정형시집 시리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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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면

한국 현대시조의 겉모습은 멀쩡하다. 1천명에 이르는 시조시인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고 시조 관련 문예지도 서너개가 된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 딴판이다.

시조를 비중있게 다루는 계간지 '열린시학'의 이지엽 주간은 "시중에 나오는 시조집의 99%가 자비로 출판한 경우다. 그나마 출판 후 사후관리가 제대로 안돼 출간되고 조금만 지나면 어디에서도 시조집을 구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독자와 시조가 만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 있다는 것이다.

'열린시학'을 발행하는 출판사 고요아침이 정형시집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시조집 출간에 나선 것은 그런 꽉 막힌 상황을 뚫어보기 위해서다. 고요아침은 매년 열다섯권에서 스무권 정도 시조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그 첫번째로 윤금초의 '이어도 사나, 이어도 사나', 이우걸의 '맹인', 서일옥의 '영화 스케치', 임삼규의 '너 아직 거기 서 있는가', 박지현의 '눈녹는 마른 숲에' 등 다섯권이 출간됐다.

다섯권의 시조집은 출판사의 우직한 기획의도에 견주어 무게가 떨어지지 않는다.

임삼규는 겨울 설악산에 주목나무가 서 있는 풍경을 "육탈이/다 끝나고/뼈가 마르는 시간//환한/눈꽃 그늘/벌 나비 하나 없다.//이승의/마지막 벼랑/뉘엿뉘엿 해가 진다."('겨울, 설악기행.1-주목나무' 전문)라고 단시조로 노래했다. 겨울 설산의 모습에 눈이 환해질 것 같다.

박지현의 시조집은 어느 쪽을 펼쳐도 눈길을 붙든다. '늦가을 들녘-어떤 풍경.2'에서 곡식 낱알들은 팔순 노인의 숨가쁜 키질에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다. 시인은 "잘 말린 깻단들을 털어내는 고소함이/가벼이 아주 가벼이 하늘까지 흔드는/잔잔한 바람결에도 흠칫흠칫" 놀란다고 그렸다.

윤금초.이우걸의 시조집은 시리즈의 무게중심을 잡아준다. 이우걸은 표제시 '맹인'에서 사물을 손으로 읽는 맹인에게 손은 세계의 창이라고 노래한 후 보고도 만지고도 세상을 읽지 못하는 눈 뜬 맹인인 자신을 반성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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