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투기꾼 안잡고 어그로꾼 잡나"…LH '꼬우면 이직' 고발 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로고. 사진 팀블라인드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로고. 사진 팀블라인드

"난 열심히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꿀 빨면서 다니련다. 이게 우리 회사(LH)만의 혜택이자 복지인데 꼬우면 이직하든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 투기 의혹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키운 이 댓글은 결국 경찰 수사 대상이 됐다. 지난 14일 LH가 이 글 작성자를 고발하면서다. LH가 주장하는 혐의는 명예훼손과 모욕, 업무방해다.

‘사건’의 발생 장소가 젊은 직장인들에게 인기를 끄는 직장인 익명 앱 ‘블라인드’라는 점에서 이 댓글에 대한 수사는 많은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법규 위반 안 잡고 사규 위반 잡나”

우선 이 글 작성자를 처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LH가 제시한 죄명이 적용될지, 익명성을 강조한 앱에서 작성자가 특정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LH가 '시선 돌리기', '물타기'를 시도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블라인드의 한 이용자는 "정작 법규 위반인 투기꾼은 안 잡고 사규 위반인 어그로꾼만 잡으려고 공권력을 낭비한다"는 글을 올렸다.

LH "직원이면 즉각 파면 및 배상 청구"

블라인드에 게시된 LH 직원 추정 글. 인터넷 캡처

블라인드에 게시된 LH 직원 추정 글. 인터넷 캡처

지난 9일 블라인드 게시판에 올라온 글의 제목은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 씀'이었다. LH 직원들의 투기 의혹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방어 또는 반박 차원에서 쓴 것으로 추정된다.

LH는 이에 대해 "허위사실 기반의 자극적인 글이 게시된 뒤 다수의 언론에 보도되면서 공사의 명예가 현저히 실추됐고, 이로 인해 사태 수습과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이 저해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글은 부적절한 언사로 LH 직원과 가족, 전 국민을 공연히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했다"고 덧붙였다. "작성자가 LH 직원임이 밝혀질 경우 즉각 파면 등 징계 조치하고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강구하겠다"고도 했다.

처벌 가능성에 의견 갈려

작성자가 실제 LH 직원인지는 미지수다. 퇴사자가 기존의 아이디로 글을 올렸거나, 아이디가 해킹됐을 가능성 등을 배제할 수 없어서다.
김범한 형사전문 변호사(법무법인 YK)는 직원인지와 상관없이 "작성자에 대한 형사처벌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명예훼손과 모욕죄의 경우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해당 글의 대상은 LH를 비난하는 일반 국민이기에 특정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김 변호사는 또 "업무방해죄는 폭행, 협박, 위력 등이 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구성 요건 해당성도 아예 없다"고 했다. 이어 "특정인을 찾아 처벌한다는 것 자체가 시선 돌리기"라며 "내부자 정보를 이용해 부동산 투기를 한 게 본질인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일환 같다"고 비판했다.

LH가 법인 자격으로 고소했을 경우엔 처벌이 가능할 수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위원은 "LH가 법인으로서 명예가 훼손됐다고 주장할 경우 법인에 대한 명예훼손죄와 모욕죄는 성립될 수 있다"고 봤다. 승 위원은 또 "작성자가 올린 글의 제목인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 쓴다'는 말은 기업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해 업무방해죄 성립도 가능하다"고 했다.

블라인드 '익명 보장' 딜레마

작성자를 특정할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김범한 변호사는 "(블라인드에 대한) 압수 수색을 하면 작성자가 밝혀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승재현 위원은 "IP추적을 통해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지 정도는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익명을 보장하던 블라인드 앱으로서는 ‘딜레마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블라인드 관계자는 "수사기관의 요청이 온다면 최선을 다해 협조할 예정이지만, 전달 드릴 개인 정보가 없다"며 "IP 주소를 포함해 게시물 작성자를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정보도 시스템 내부에 저장하지 않아서 해당 게시글 작성자는 특정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회사 이메일로 인증하는 절차에 대해선 "인증과 동시에 회사 이메일을 복구 불가능한 형태로 암호화한다"고 설명했다.

블라인드 이용자들도 작성자의 ‘운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LH 사태 블라인드 조롱 글'이란 제목으로 작성된 한 글에는 “블라인드 시스템이 자기들도 찾을 수 없는 시스템이라던데 만약 잡히면 그걸 역설하는 꼴이다”,“잡히면 블라인드 망한다”, “블라인드 스스로 블라인드가 아님을 인정하는 꼴 일듯” 등의 댓글이 달렸다.

'파면'은 보여주기용 엄포?

작성자가 특정되고 실제 블라인드 직원으로 확인되어도 LH의 계획처럼 파면까지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지난 2016년 교육부 고위 공무원이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고 발언한 것과 관련해 파면 처분을 받았다가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사례가 있다.

승재현 위원은 "만약 파면이 되면 (작성자가) 행정소송을 제기해 법정 다툼을 할 확률이 높다. 보여주기식 파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LH 측도 성급한 판단을 내리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정희윤 기자 chung.heey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