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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돌직구’조식이 이황과 주고 받은 편지 유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95)

퇴계가 지조를 지키는 매화를 노래한 시를 모은 ‘매화시첩’의 첫 부분.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퇴계가 지조를 지키는 매화를 노래한 시를 모은 ‘매화시첩’의 첫 부분.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유머는 선비의 또 다른 내공이다. 남명 조식은 1501년 같은 해 태어난 퇴계 이황과 흔히 비교된다. 낙동강을 경계로 좌우에 살았던 두 사람은 평생을 학문에 몰두하며 수많은 인재를 길렀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러나 기질이나 출처는 사뭇 달랐다. 남명은 임금 앞으로도 싫은 소리 올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돌직구’ 직언형이다. 이에 비해 퇴계는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감화시키는 스타일이다. 또 남명은 여러 차례 벼슬을 천거 받았지만 딱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는 대과에 급제한 뒤 140여 회 벼슬을 권유받고 79차례 사직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생전에 서로 명성을 듣고 있었지만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다. 편지만 다섯 차례 오갔을 뿐이다. 1553년 성균관 대사성 퇴계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 그 무렵 조정이 남명에게 정6품 관직을 내렸지만 사양하자 퇴계는 벼슬을 권하는 간절한 뜻과 함께 교유를 제안한다.

퇴계 이황을 기리는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퇴계 이황을 기리는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천 리 먼 곳에서 정신적으로 교제하는 것은 옛사람들도 숭상하는 바입니다…벼슬길에 나가는데 경솔하여 말로에 낭패를 보는 것은 비루한 자의 소행이고, 한 번 나오는데 신중하여 평소 가진 절개를 온전히 지니는 것은 훌륭한 자의 넓은 식견입니다…황은 올립니다.”

이 간곡한 뜻에 남명은 화답한다. “하늘에 있는 북두성처럼 평소 우러러보았고, 책 속에 있는 성현처럼 까마득하니 만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간절한 뜻으로 깨우쳐 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저의 병통을 다스릴 약이 될 말씀이 넓고도 많아 아침저녁으로 만나던 사이 같았습니다…게다가 눈병까지 있어 앞이 흐릿하여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명공(明公)께서 발운산(撥雲散, 눈앞의 흐릿함을 없애는 안약)으로 눈을 밝게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남명 조식을 기리는 경남 산청군 덕천서원. [사진 송의호]

남명 조식을 기리는 경남 산청군 덕천서원. [사진 송의호]

남명은 해학과 풍자에 능했다. 발운산이라는 비유를 통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한다. 퇴계도 답장에서 “발운산 분부는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도 당귀(當歸, 약초 이름이지만 ‘마땅히 돌아가야 한다’는 뜻도 된다)를 구하고 있는데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며 유머로 응수한다. 1564년 이번에는 남명이 편지를 보낸다. 그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한 뒤 후반부에 슬쩍 비판을 곁들인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선생 같은 분은 우러르는 사람이 참으로 많으니,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이 무렵 퇴계는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일은 유학자들 사이에 당시 큰 화제가 됐다. 남명은 그러나 이 논쟁을 단지 헛된 이름이나 훔치는 것으로 단정했다. 퇴계는 답장에서 남명의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세상 사람이 도를 지향하도록 만들려면 논의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덧붙인다.

남명이 경(敬)의 몸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쇠방울 성성자와 경의검 모형. [사진 송의호]

남명이 경(敬)의 몸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쇠방울 성성자와 경의검 모형. [사진 송의호]

두 사람 사후 제자들은 정치적으로 갈라선다. 남인과 북인이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후대에 두 사람을 이렇게 평가했다.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했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 문화는 여기서 절정에 달하였다.”

민감한 쟁점일수록 유머가 있는 성숙한 토론이 그리운 시대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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