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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스믈까지 시집갈씨니…”한글 정신 이은 『여자소학』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92)

새해 벽두에 퇴계학진흥회 이재갑(69) 사무총장이 최근 출간된 『여자소학(女子小學)』을 보내왔다. 율재 이한걸이 일제강점기에 편찬한 『여자소학』에 대한 연구와 역주, 영인본을 함께 수록한 책이다. 율재는 이재갑의 종조부다.

『소학』은 조선시대 서당과 향교, 서원 등의 필수 교재였다. 『소학』은 여성이 알아야 할 내용도 상당량 포함돼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대체로 여성에겐 교육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성은 부형을 통해 『소학』의 일부 내용을 전달받아 마음가짐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한걸이 일제강점기에 이런 모순을 발견하고 『소학』에 나오는 여성 관련 내용을 뽑아 만든 책이 『여자소학』이다. 율재는 1927년 서울에서 『여자소학』을 간행했다.

『여자소학』의 표지. [사진 송의호]

『여자소학』의 표지. [사진 송의호]

“자식이 능히 밥 먹거든 가라치대 오른손으로써 하게 하며…”, “열이오 또 다섯 해어든 비녀 곳고 스믈까지 시집 갈씨니 연고(부모의 상사) 잇거든 스믈세 해까지 시집 갈씨니라” 등의 내용이다. 당시는 일부 여성이 일본식 또는 서양식 신식 교육만 받던 시절이다. 이 책이 편찬되자 몇몇 학교는 교재로 사용했고 율재는 고향인 안동 주촌 지암서숙에서 교재로 사용하며 직접 가르쳤다. 그러나 일본의 한글 사용 금지 등으로 『여자소학』은 크게 보급되지 못한 것 같다는 게 서문을 쓴 허권수 박사의 분석이다. 이후 광복을 맞으면서 우리 것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면서 이 책의 존재도 잊혔다. 이 책은 용케 이재갑의 어머니가 한 권을 간직한 게 전해져 2005년 서울대 김주원 교수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여자소학』을 간행한 율재는 훈민정음 전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국보 제70호인 간송미술관 소장 훈민정음 해례본이 본래 이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여자소학』에 관련 내용이 정리돼 있다.

이 집 안에 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세상에 알려진다. 율재의 셋째아들인 이용준(1916~2000전후)이 1936년 명륜학원 연구과에 입학했는데, 이때 명륜학원 강사인 김태준을 만나게 된다.

해례본의 존재를 최초로 알린 것은 조선일보 1940년 7월 30일 방종현의 ‘원본훈민정음의 발견’이라는 기사다. 여기에는 “수월 전 그 원본이 경북 모 고가에서 발견되어 시내 모씨의 소유로 돌아간 것”이라며 1940년 7월 이전 전형필 손에 들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여자소학』의 첫 부분 '내편'.

『여자소학』의 첫 부분 '내편'.

한편 훈민정음 해례본을 전형필에게 넘긴 것에 대해 그동안 여러 곳에서 이용준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용준은 김태준과의 관계로 중간에서 연결만 했으며 이 책을 주도적으로 넘긴 이는 바로 이한걸이라고 『여자소학』은 밝히고 있다.

이재갑 사무총장은 “훈민정음 해례본은 진성 이씨 주촌종택의 세전가보”며 “책을 넘길 당시 이한걸 종조부는 융감(장티푸스 일종)에 걸려 방에 격리되고 마당에서 집안 어른과 김태준 교수가 양도계약서를 썼다고 전해지며 해례본 책값(기와집 10채 가격)도 문중에서 은행 빚 갚는 데 썼지 종조부가 쓴 게 아니라는 것이 집안에 알려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행방과 별개로 세종이 중국 한문을 해독하기 어려운 아녀자 등을 배려해 한글을 창제한 정신은 480년 뒤 다시 여성을 배려한 한글 『여자소학』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이한걸의 한글 사랑과 깊은 이해가 훈민정음 해례본 보존으로도 연결된 것일까.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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