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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거북선 닮은 이덕홍의 귀갑선, 다른 점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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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93)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이 일본에 승전할 수 있었던 비밀 병기는 무엇이었을까.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이끌어낸 거북선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의 침입을 예상하고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특수 군선 거북선(龜船)을 새로 건조했다. 이순신이 올린 장계에는 “(거북선은)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이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다”고 성능을 밝히고 있다. 거북선은 이 기록 한 달 뒤인 1592년 5월 사천 해전에 처음 투입된 뒤 선봉 돌격선으로 조선 수군 승리에 크게 기여한다.

『간재집』에 실린 ‘귀갑선도’(왼쪽 아래)와 ‘침수진목전도’(왼쪽 위). 오른쪽은 ‘진계도’.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간재집』에 실린 ‘귀갑선도’(왼쪽 아래)와 ‘침수진목전도’(왼쪽 위). 오른쪽은 ‘진계도’.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거북선이라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을까. 유력한 출처 중 하나는 선비 출신으로 후일 왕세자 광해군의 참모가 된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의 문집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용어는 ‘귀선’ 아닌 ‘귀갑선(龜甲船)’이다.

“귀갑선은 적을 무너뜨리는 좋은 계책입니다. 그 배는 등에 창검을 붙이고, 머리 부분에 쇠뇌를 숨겨 설치하며, 허리에는 판옥(板屋)을 두고 그 가운데 사수(射手)가 들어가며, 옆으로는 사격하는 구멍을 내고 아래로는 배의 내부로 통하게 합니다. 가운데는 총통(銃筒)과 큰 도끼를 두고 때려 부수기도 하고 철환(鐵丸)을 쏘기도 하며 활을 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부딪치는 자는 부서지고 침범하는 자는 무너지니 적선이 비록 많아도 대응책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간재 이덕홍이 퇴계 이황 선생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언행을 기록한 『계산기선록』의 일부.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간재 이덕홍이 퇴계 이황 선생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언행을 기록한 『계산기선록』의 일부.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1592년 11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우부솔(右副率) 간재가 왜란 중 세자 광해군을 찾아 올린 글이다. 누가 읽더라도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떠오를 것이다. 간재는 이어 1593년 1월에는 난을 피해 의주 행재소에 머물던 선조 임금에게 소를 올린다. 이번에도 귀갑선을 언급한다. “그러므로 이 목책과 귀갑선을 마련하면 공력을 적게 들이고 효과는 매우 클 것입니다. 각 관청이 한 달의 공력만 들이면 아마도 세상에 없는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간재는 임금에게 바다에서 적을 막을 수 있는 유용한 병기로 귀갑선 건조를 건의하고 ‘상행재소’ 끝에 도면인 ‘귀갑선도’를 첨부했다.

이순신의 거북선은 여기서 나온 것일까. 물론 학계에서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또 간재가 왕세자에게 글을 올린 시점은 충무공이 해전에서 거북선을 투입한 직후다. 그럼에도 간재가 그린 간략한 귀갑선도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간재의 당대 교유 관계 때문이다. 간재와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데다 한 살 차이로 가까운 사이였다. 간재가 제작한 귀갑선도는 류성룡에게 건네져 이순신에게 보내졌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퇴계의 제자로 이순신의 형인 이요신을 통해 전해졌다는 설이다. 하지만 아직 귀갑선도와 거북선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료는 충분치 않다.

경북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의 간재종택. [사진 송의호]

경북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의 간재종택. [사진 송의호]

이와 관련해 해군사관학교 복원 거북선 건조에 참여했던 정진술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거북선의 실물자료는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며 “간재의 귀갑선은 이순신의 거북선과 동일한 형상과 규격은 아니지만 상통한다”고 분석한다. 그는 “간재의 귀갑선은 귀선 등 특수 군선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 우리 수군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 거북선에 그 정신을 함께 담았다고 봐야 할 것”이라 덧붙였다. 간재는 퇴계 제자로 성리학자였지만 국난을 당해서는 적을 제압할 기구로 철타와 활을 강조하고, 전쟁에서 펼칠 진법을 제시하는 등 병략에도 밝았다. 선비는 공허하게 형이상학만 추구한 게 아니었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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