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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얼룩말, 10㎝ 차로 운명 갈려…사소한 게 승부 좌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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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호 16면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자연에서 배우는 생존 이치

무명 가수들이 출전한 jtbc 음악 경연 프로그램 ‘싱어게인’에 꽤 자주 나왔던 장면이 있다. 맞붙은 두 가수의 실력이 막상막하가 되면 심사위원 8명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비튼다.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까닭이다. 괴로워하다 결국 한 사람을 선택하는데 나오는 결과에 자신들도 깜짝 놀란다. 박빙이 아니라 7대 1이나 8대 0이라는 압도적인 점수 차 때문이다. 분명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실력인데 왜 이런 극단적인 결과가 나타날까?

지구력 약한 사자, 근거리서 기습 #얼룩말은 사력 다해 더 뛰면 살아 #물컵 하나 던진 게 대기업 흔들듯 #사소한 것이 예측불가 변화 만들어 #삶은 하루하루 매 순간이 분기점 #힘들 때 한 발 더 내딛는 게 중요

아마 심사위원들의 마음에서 둘의 점수는 49.9대 50.1 정도였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점수를 더 준 건데, 문제는 그 ‘누군가’가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차이였던 것이 엄청난 차이가 되어버렸다.

사소한 것이 결코 사소하지 않게 되는 이런 일은 저 먼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에서도 일어난다. 지금도 수백만 마리의 야생동물이 자연 그대로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오늘도 사자와 얼룩말의 쫓고 쫓기는 대결이 벌어진다. 대결은 대부분 100~200m쯤에서 1, 2m 정도의 거리로 좁혀지는데 사자 입장에서 보면 승리가 코앞에 있고, 얼룩말 쪽에서 보면 죽음이 바로 뒤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이길까? 아니, 무엇이 승부를 결정지을까?

사자들은 보통 얼룩말 몰래 가까이 다가가 전광석화처럼 뛰어나가는 기습을 즐긴다. 고양이과 동물들이 그렇듯 오래 뛸 수 없기 때문이다. 300m 이상 전력질주를 하면 뇌 혈관이 터질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한 200m 이내에서 승부를 내려고 한다. 그래야 실패해도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약속이나 한 듯 100~200m 사이에서 초접전 상황이 벌어지는데, 사실 이 상황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얼룩말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기에 숨이 가쁘고 사자는 한계 시점에 가까워지고 있어서 그렇다.

이 숨막히는 균형은 어느 순간 한쪽으로 확 기우는데 대개 아주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요인이 작용한다. 누가 한 번 더 힘을 내 조금 더 뛰고, 한 번 더 뛰느냐 하는 게 그것이다. 얼룩말이 죽을 힘을 다해 한 번 더 뛰면 죽음에서 멀어질 수 있다. 사자가 젖 먹던 힘을 다해 한 번 더 뛰면 굶어 죽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승부는 많은 경우 1, 2m가 아니라 아슬아슬하다고 할 수 있는 10, 20㎝ 차이로 갈린다. 하지만 아슬아슬함과 승부는 별개다. 아무리 아슬아슬했더라도 더이상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면 사자는 실패한 것이다. 거의 이길 뻔했던 노력이 가상하다고 ‘아차상’ 같은 게 주어질까? 이 실패가 열 번째라면 굶어 죽을 수도 있다. 얼룩말 역시 불과 10㎝ 차이로 아쉽게 붙잡혔다고 관용 같은 게 주어질 리 없다.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사소하지 않다. 아니 사소한 것이 결정타가 된다. 생과 사를 결정한다.

지난 1977년 일리야 프리고진은 산일구조(dissipative structure)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는데, 그에 따르면 화학적 변화는 안정적인 질서 상태에서 무질서처럼 보이는 변화를 거쳐 새로운 안정 상태가 된다. 커피에 우유를 넣으면 무질서하게 퍼지다가 안정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 이 무질서라는 과정에 어떤 패턴이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움직임이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쪽이나 저쪽으로 퍼지는 분기점에서의 방향 선택이 우연하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연한 결정은 외부 조건이나 시스템의 특성보다는 자체의 특성, 그러니까 사소한 움직임에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민감한 상태일수록 더 그렇다.

그런데 이런 변화 양상 역시 화학적 세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요즘 같은 복잡계 세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컵 하나 던진 게 대기업을 흔들고, 예전에 했던 잘못 하나가 일파만파로 번져 인생 행로를 확 바꿔버린다. 사소한 움직임들이 모여 어느 순간 예측하지 못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문제는 우리 삶 또한 이런 변화 속에 있기에 어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매 순간이 분기점일 수도 있다. 말했다시피 분기점에서는 사소한 것이 승부를 넘어 생과 사를 좌우하는데 커피 속 우유처럼 우연이 방향을 결정하도록 놔두어야 할까? 그럴 수 없다. 프리고진의 말처럼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우연에 맡기지 않는 세상의 능력자들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쪽으로 가게 해야 한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힘든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자꾸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려는 삶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이끌고 가려고 하니 머리가 아프고 속이 끓고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불안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분기점에서는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 힘들 때 조금 더 힘을 내서 한 번 더,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이 많은 것을, 때로는 삶 자체를 바꾼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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