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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설날에 만난 남편 "사는 날까지 재밌게 살다 온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79) 

연휴 3일간 형제도, 가족도 못 오게 했지만 나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라 좋았다. 첫날은 혼자 사는 친구와 함께 독립 영화 한 편 보고 거나한 점심을 먹고 차 한잔 나누었다.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함께 나눌 친구가 더 소중한 나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받은 용돈을 자랑하며 서로 밥값을 내겠다고 실랑이한다. 행복한 돈 쓰기다.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남자는 늘 그 모습으로 빙그레 웃고 있고, 나는 무릎이 아파 앉지도 못하고 서서 주절주절 안부를 들려준다. [사진 unsplash]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남자는 늘 그 모습으로 빙그레 웃고 있고, 나는 무릎이 아파 앉지도 못하고 서서 주절주절 안부를 들려준다. [사진 unsplash]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지난 1년을 정리한다. 일 년 365일 중 연말 혹은 연초 중 딱 하루는 나를 죽인다. 유언장을 새로 점검하고 올해 찍은 가장 멋진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변경해 붙이면서 그날의 경건함으로 일 년을 잘 살아가길 기원한다. 아이들은 궁상떤다며 혀를 차지만 10년 전부터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죽음에 대해 경건하게 생각해 보는 하루가 있어 그랬는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지금은 혼자 남아 잘살고 있다. 1년간의 시간을 뒤돌아보고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정리하고 내일 죽는다면 꼭 남기고 싶은 말과 재산도 점검한다. 일 년 내내 코로나로 모든 게 묶이고 어수선함에도 별일 없이 한 해를 보냈으니 감사하다. 유언장을 다시 읽어보니 경건해지고 찔끔 눈물도 난다. 재산도 변함없이 그대로다. 주택연금용 집 한 채와 늘 함께 다니며 친구가 되어 주는 작은 애마 한대, 굿 ‘모닝’. 보험증권과 비상시에 쓸 통장에 남은 300만원도 안 되는 잔고, 부채 없음, 그것이 전부다. 가벼워서 좋다.

음력 1월 1일 설날 아침, 별거(?) 중인 남편을 만나러 간다. 살아생전 좋아했던 소주 한잔 부어주고 다방 커피 한잔은 내가 대신 마시며 안부 전한다.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 남자는 늘 그 모습으로 빙그레 웃고 있고 나는 무릎이 아파 앉지도 못하고 서서 주절주절 안부를 들려준다. “칫, 나만 늙어간다.” 그래도 미소에서 답을 읽는다. “내가 지키줄끼다. 사는 날까지 재밌게 살다 온나.” 101동 106호, 살면서는 누려 보지 못할 내 방이 있는 집. 남편의 옆 칸, 죽어서도 들어갈 집이 있는 나는 부자다. 최신형 고급 아파트이지만, 그래도 이 집엔 오래도록 들어가고 싶지 않다.

남편이 사는 아파트엔 사진과 함께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새겨져 있다. 101동엔 남편과 비슷한 나이의 다섯 분이 좌우 아래위로 이웃해 계신다. 그래서 동호회 모임 같아 외롭지 않겠다며 아이들과 허한 농담을 하곤 한다. 비어있던 옆 동 한 칸엔 죽기엔 너무 서러운 40대 신참이 들어와 있다. 어쩌다가 젊은 나이에 여기 왔을까. 아직 사진도 없다. 내일 당장 죽을 줄도 모르고 하늘 향해 고개 한번 들어 보지 못하고 열심히 살았을 우리의 이웃이다. 이곳의 사진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영정 사진 표정에서 인생을 읽는다. “참 잘살다 가셨네요” 명복을 빈다.

길 건너엔 단독 주택(?) 묘지가 있다. 친정 부모님은 거기 계신다. 어느 젊은 여인의 묘지엔 온갖 꽃으로 장식돼 있고 수많은 편지글과 성적표 등을 복사해 와 붙여놓아 방문할 때마다 그리로 가 안부를 훔쳐본다. ‘아이들이 벌써 졸업을 했네’, ‘취직도 했나 보다’…. 마치 이웃집 소식 듣듯 마음이 따뜻하게 전해졌는데, 오늘 보니 딸인지 아들인지 결혼사진이 붙어있다. 눈물이 찔끔 난다. 망자는 늘 웃고 있는 젊은 새댁이지만, 아이들이 어느새 일찍 떠나버린 엄마 나이가 된 것이다. “세상 이야기 전해 듣는 그대는 죽어서도 행복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재밌고 즐겁게 사는 것, 여한 없이 사는 것, 걷다가 죽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다. [사진 pixabay]

욕심을 버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재밌고 즐겁게 사는 것, 여한 없이 사는 것, 걷다가 죽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다. [사진 pixabay]

나는 가난한 엄마다. 내가 떠난 뒤 자식이 돈 걱정 없이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이 첫째인지라 큰 액수로 재해보험을 넣어놨지만 복(?)이 그리 쉽게 오남. 에휴. 유산을 못 남길 바엔 떠난 후 자식들이 부모 이야기를 나눌 때 참 잘살다 가신 임으로 기억되게 사는 것뿐이다. 돈을 벌어 큰 유산을 남기기도 어렵지만 무탈하게 잘살다가 가는 것은 더 어렵다. 욕심을 버리고 이웃에게 봉사하며 재밌고 즐겁게 사는 것, 여한 없이 사는 것, 걷다가 죽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다.

명절에도 근무하는 친구가 또 점심 먹잔다. 이번엔 내가 비싼 거로 사겠다며 몇몇 비싼 요리식당에 전화하니 모두 문을 닫았다. 돌고 돌아 365일 문을 여는 우리 동네 음식점으로 들어가 맛있는 짬뽕으로 비싼 음식을 대신한다. 자판기 속 공짜 커피 한잔 입에 물고 나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오래 바라본다. 7000원짜리 밥 한 그릇이지만 7억 부자 같은 여유로움이다. 일 년 중 하루를 뺀 나의 364일은 눈만 떠도 설레는 나날이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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