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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마음 쓰레기 버리기 좋은 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75)

한 여인이 여행을 떠난다. 남편의 일탈에 밀려드는 삶의 절망과 자기 모멸감에 병이 생긴 여인은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낯선 남자를 만난다. 힘들고 지친 마음속 응어리를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다 토해내고 처음 만난 사람과 짧은 사랑을 나눈 후 돌아와 남편을 이해하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갈 때의 홀가분함과 마음 비움이 신선하게 다가온 소설책 이야기다.

작년 이맘때엔 시베리아에 있었다. 며느리가 새해 선물로 보내준 것이다. 먼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두 다리로 걷는다는 거고 아직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는 거다. 나름 현실에서도 ‘소설 같은 그런 만남이 있었으면’하는 희망을 안고 떠났는데 폭설과 영하 20도를 넘는 꽁꽁 얼어붙은 강추위에 사랑이고 나발이고 잘 돌아가기만 기원했다. 대신 여행보다 사람들과의 만남만 새록새록 기억난다. 다녀오자마자 코로나 사태가 터져 그때 미루었다면 아쉬움이 컸을 것 같다.

깊게 갇혀 있던 마음속 상처의 응어리를 토해냈다. 밤이 새도록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이다. [사진 unsplash]

깊게 갇혀 있던 마음속 상처의 응어리를 토해냈다. 밤이 새도록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이다. [사진 unsplash]

나 말고도 혼자인 사람이 몇 명 있었다. 나는 딸 나이의 예쁜 처녀와 룸메이트가 되었다. 그는 결혼을 앞두고 싱숭생숭한 마음을 다스리려 혼자 비행기를 탔다. 낯선 사람과의 첫날 밤, 처음엔 서먹해 차를 마시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 날엔 맥주의 힘을 빌리더니, 그다음 날엔 아주 센 술의 힘을 빌려 깊게 갇혀 있던 마음속 상처의 응어리를 토해냈다. 밤이 새도록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이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울며 안아 줄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내 딸과 동갑이어서다. 그는 부모가 일찍 이혼해 고아같이 살아왔는데 결혼을 앞두고 부모가 연락해왔다고 했다. 내가 그 안에서 살아보지 않고는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는 깊은 가정사다. 나는 온갖 가시덤불을 헤치며 힘겹게 살아온 자식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묵묵히 들어주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아마도 지금 결혼해 잘살고 있으리라.

출발하는 비행기에서는 젊고 예쁜 여자가 내 옆에 탔다. 몸매도 인물도 유난히 아름다워서 보기만 해도 부러웠다. TV를 자주 본 사람이면 다 알아보는 유명인이었는데, 나만 몰라봤다. 온 가족이 함께 앉아 수다를 떨었지만, 그는 말을 한마디도 안 했다. 우리말을 할 줄 모르는 한국계 외국인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행은 엄마의 우울한 마음을 전환하기 위한 가족 여행이었다. 자녀들이 극진하게 엄마를 챙기고, 그들의 애틋한 표정만으로도 명약이 되어 엄마를 일으키는 힘이 될 것이다. 비행기에서부터 알아서 그런지 5일 내내 함께 다니며 마주치면 미소 가득한 목례로 인사를 하곤 했다. 호기심을 부르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좌석 배정이 잘못되어 그들 가족이 다 떨어져 앉게 되었다. 그가 또 내 옆자리로 배정이 된 것이다. 반가움에 서로 손을 잡으며 목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두 번 다 짝이 되다니 참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늘에서 마음 깊은 곳에 눌러 놓았던 많은 사연을 다 끄집어냈다. [사진 unsplash]

그는 하늘에서 마음 깊은 곳에 눌러 놓았던 많은 사연을 다 끄집어냈다. [사진 unsplash]

비행기가 이륙하고 피곤함에 절은 잠을 청하려는데 그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착륙할 때까지. 그는 하늘에서 마음 깊은 곳에 눌러 놓았던 많은 사연을 다 끄집어냈다.

‘그래도 너는’, ‘그래도 나는’, ‘그래도 너니까’, ‘그래도 나 때문에’….

수많은 ‘그래도’가 대화를 연결해주는 징검다리가 되어 몇 시간을 지루함도 없이 같이 울고 웃었다. 헤어지면서 우리는 서로를 꼭 안아 주었다. 혹시라도 아주 힘들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으면 여행 삼아 오라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내 명함도 건네주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낯선 전화번호로 문자가 왔다. 그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이다.

“저를 기억하실는지요?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답니다. (생략) ***올림.”

나는 지금도 가끔은 신에게, 여행길에 만난 낯선 이에게, 때론 씩씩하게 집 청소를 하며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마음에 쌓인 삶의 곡절을 옹알이하듯 혼자서 욕지거리하며 풀곤 한다. 내일은 대설특보가 있다. 그래도 이런 날엔 눈 속에 파묻어 버리든, 꽁꽁 얼려서 버리든 마음 쓰레기 버리기엔 참 좋은 날씨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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