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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임종 앞둔 남편이 벌인 개오동나무 벌목 소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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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76)

오래전 일이다. 윗집 할머니가 속상한 얼굴로 내려오셨다. “아재요, 저 우라질 나무 언제 자를거여? 나물 꼬라지 좀 보소, 속상해 죽겠어.” 어른은 채전밭에서 멀대같이 키 큰 것만 솎아와 모가지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아이고 예쁜 춘*씨 화가 많이 났구마. 걱정 마소. 내가 조만간 잘라 줄 거니.” 스무 살이나 연상인 기역자 어르신의 어깨를 안아주며 마치 애인 다루듯 달랬다.

어르신 밭에 그늘을 만드는 그 나무는 개오동나무다. 나무는 5층 건물 높이는 될 성싶게 울창한 가지와 높이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여염집 안방에 으스대고 들어앉을 가구목이 되고, 악기가 되는 오동나무는 씨앗 번식도 잘하고 활력이 좋아 순이 나오면 한해에 2m 이상 자란다. 개오동나무는 더 잘 큰다. 오죽하면 딸 낳은 기념으로 오동나무를 심는다 하지 않나. 세월만큼 아름드리나무가 되는 것이다.

나무를 베고 나면 큰 둥치는 남정네들이 차지하더라도 가지들을 틈틈이 잘라 일년 동안 땔감으로 쓸 수 있다. [사진 pixabay]

나무를 베고 나면 큰 둥치는 남정네들이 차지하더라도 가지들을 틈틈이 잘라 일년 동안 땔감으로 쓸 수 있다. [사진 pixabay]

이번에, 이번에 하다가 여러 해를 넘기고 이제는 손을 못 댈 만큼 덩치가 커져 버렸다. 어르신은 이리저리 얽힌 고향 사람보다 타지에서 들어온 남편이 그 일을 해주기엔 안성맞춤이라 생각하고 볼 때마다 꼬드겼다. 힘쓰는 일을 해야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남편이 덩달아 저 나무로 배를 만들어 낙동강에서 뱃놀이할 거라 떠들고 다녔으니 말이다. 어르신의 계산도 있었다. 나무를 베고 나면 큰 둥치는 남정네들이 차지하더라도 나머지 가지들을 틈틈이 잘라 옮겨도 일 년 땔감이 되는 것이다.

“어르신요, 이이는 몸이 안 좋아 그런 힘든 일은 못 해요. 그리고 큰 나무는 함부로 자르는 게 아니래요. 잘못하면 나무가 사람에게 해를 입힌대요. 당신, 나무에 손만 댔단 봐.”

나는 매번 으름장을 놓으며 남편에게 눈총을 주었다. 어르신도 언제 나무 이야기를 했냐는 듯 이런저런 푸념을 하다가 돌아가길 몇 번째다.

“이 사람아. 나야 이왕 죽을 날 받아놨는데 무서울 기 뭐 있나? 어른도 나도 좋은 일인데 잘라보자. 내는 열여섯 살부터 나무 장사해서 가족 먹여 살린 사람이야. 나무 쓰러뜨리기는 식은 죽 먹기고 전문기술자제.”

남편은 진짜 배가 만들고 싶었던 건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희망을 꿈꾸며 자신의 상태를 실험해보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어르신의 땔감을 걱정해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얼토당토않은 계획이지만 그림도 그리고 전문서적도 뒤적이는 그 열정은 대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남편을 나무 근처엔 얼씬도 못 하게 무슨 일이든 동행했다. 어느 날, 마을 어귀 언덕에서 쑥 뜯는 일에 동행한 남편은 빈 바구니를 돌덩이같이 들고는 바위에 걸터앉아 햇살 바라기를 하며 바구니가 무거워 죽겠다고 투덜거렸다.

“그 힘으로 나무를 자른다고? 흥, 소가 웃겠네. 나도 몰라. 죽든 말든 맘대로 해.”

바구니 들 힘도 없다던 남편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살금살금 뱀 풀숲 지나가듯 나에게서 벗어나 넓은 등을 보이며 어슬렁거리는 개를 큰 목소리로 불러 함께 산으로 달렸다.

밤나무를 벤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쩌면 오래전 나무 베기 소동이 다시 재현될 것 같은 생각에 잠을 설친다. [사진 pixabay]

밤나무를 벤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쩌면 오래전 나무 베기 소동이 다시 재현될 것 같은 생각에 잠을 설친다. [사진 pixabay]

쑥 바구니의 천배도 넘는 엔진 톱과 막걸리가 든 가방을 메고 며칠이나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어느 날, 천지가 진동하듯 ‘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큰 나무가 마치 쉬어가는 노인네처럼 산비탈로 스르륵 드러누웠다. 며칠 전부터 남자 몇 분도 거들더니 드디어 나무 밑동까지 벤 것이다. 구경하던 동네 사람들이 앓던 이 빠진 듯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애물단지를 처리하던 날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남편이 떠난 후 아름드리 나무둥치는 낙동강에 둥둥 뜰 수 있게 물기가 쏙 빠지도록 건조해 바로 춘* 할머니에게 선물했다. 팔십이 넘어 허리·다리가 아파 걷기도 힘들다던 어르신은 언제 아팠냐는 듯 리어카로 힘차게 실어 날랐다. 밀어주며 돕다가 내가 더 몸살이 났다.

남편은 가끔 수호 천사를 보낸다. 동네 분들이랑 마당 앞에 있는 밤나무 일부를 자르기로 했다. 지붕을 덮을 만큼 자란 나무는 비바람이 몰아칠 땐 가지가 집을 때리고 부딪쳐 무서웠다. 오래된 고목인지라 톱을 쓰기 전 나무 신에게 바칠 술과 제상도 준비해놨다. 제상을 준비한 것을 보고 톱질하기로 한 이웃 어르신이 칭찬하신다. 밤나무 벤다는 소식을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어쩌면 오래전 나무 베기 소동이 다시 재현될 것 같은 생각에 잠을 설친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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