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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와 조율했단 유명희 사퇴, 본인 원했는데 靑이 극구 말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WTO 사무총장 후보직 사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WTO 사무총장 후보직 사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도전했다 사퇴한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이미 지난해부터 후보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청와대가 만류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 본부장은 지난 5일 오후 예정에 없던 기자회견을 열어 WTO 사무총장 후보 사퇴를 발표했다. 그는 회견장에서 “WTO 차기 사무총장에 대한 회원국의 컨센서스(전원 합의) 도출을 위해 미국 등 주요국과 협의를 진행해 왔지만, WTO 기능의 활성화 필요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사퇴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퇴 의사 결정을 미국 정부도 존중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ㆍ미 간) 긴밀히 조율해 왔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6월 사무총장 선거에 뛰어든 유 본부장은 1·2라운드(회원국 협의)를 통과해 최종 후보 2명에 올랐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진행한 선호도 조사에서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에 밀렸다. 163개 회원국 중 102곳이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지지했을 만큼 전세가 기울었다. 선호도 조사 결과가 뒤지면 이에 승복해 후보 사퇴를 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사퇴하지 않자 국제사회에서 “무리하게 버틴다”는 비판이 나왔다.

중국이 지지한 오콘조이웨알라 후보에 대응해 유 본부장을 지지한 트럼프 정부가 지난해 11월 대통령 선거에 패하자 후보직을 더 유지할 '명분'도 사라졌다. 유 본부장이 청와대에 후보 사퇴 의사를 밝힌 건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청와대는 유 본부장의 후보 사퇴를 만류했다. 산업부 핵심 관계자는 “유 본부장이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 당선 직후 사실상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바이든 정부가 입장을 정하기 전까지 기다려보자’며 극구 말렸다”고 말했다. 결국 유 본부장이 진즉에 밝힌 사퇴 의사를 청와대가 계속 보류하다가, 바이든 정부마저 유 본부장 사퇴 의견을 전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인 모양새다.

판세가 기울었는데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유 본부장 카드를 고수한 결정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외교부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야당 인사는 “청와대는 유 본부장의 이번 도전을 ‘제2의 반기문 만들기’ 작전으로 생각하고 총력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그는 "물론 미 트럼프 정부의 체면을 고려해야 하는 측면도 있었다"면서 "그러나 ‘WTO 사무총장을 배출한 정부’란 치적(治績)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승산 없는 싸움을 오래 끈 유 본부장만 난감한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등과 통화해 유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등 직접 ‘외교사절’처럼 뛰었지만 결과는 '물거품'이 됐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유 본부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직후 성명을 내고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차기 WTO 사무총장으로서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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