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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대법원장감은 아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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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지난해 5월 김명수 대법원장과 임성근 부장판사 간 43분여 대화 중엔 “탄핵이 걸려 있으니까” 발언만 있었던 게 아니다. 임 판사가 한 언론에 제공한 녹취록엔 이런 대목도 있다.

“이 시대 강점”이라던 김명수 #자기 진영에 자리 준 것 외에 #사법부 위해 무엇 보여줬나

“내가 선배로서 미안하지. 나도 내 역할을 제대로 한 게 맞나, 우리 선배들이 좀 더 법원을 위해 열심히 지켰어야 했는데.” “우리 임 부장, 다른 어떤 법관보다 남다른 자존심과 의무감 있는 법관이었는데 법정에 선다는 게 얼마나 죽기보다 싫었을까. 그래 그거는 뭐 우리 선배들이 만든 병일 수도 있어.”

멀쩡한 선후배 사이의 대화로 보이나 실제론 안 그랬다. 국회 임명 동의 과정에서 도움을 줬는데도 이듬해 김 대법원장이 지시해 자신이 징계위에 회부됐다는 게 임 판사의 입장이다. 징계 중 가장 낮은 견책을 받았다곤 하나 판사직을 계속할 순 없게 됐다. 몇 차례 사의도 거부당했다. 녹음에 이른 배경이다.

사실 ‘사법농단’ 사건에서 임 판사는 ‘일개 판사’(진중권)다. 그런데도 결국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된 일선 법관이 됐다. ‘선배로서 미안하지’와 ‘탄핵소추된 후배’ 사이의 간격은 아득하다. 김 대법원장의 의도는 뭐였을까.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될 때만 해도 그는 새로운 인물로 포장됐다.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비주류에다 서열 파괴 인사였다. 스스로 “이 시대에 더 강점이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야당 원내대표(주호영)가 국회에서 “김명수 대법원장, 사법부 수장으로서 부끄러운 줄 아시오. 사법사에 어떤 대법원장으로 기록될지 두렵지 않으냐”고 외치는 지경에까지 갔다. 대법원장이 그런 모멸을 겪었다는 얘기를 근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같은 편에서도 “배신했다”(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고 한다.

양쪽에서 다 비판하면 제대로 일하는 것이라고 위로할지 모르겠으나 김 대법원장에겐 해당하지 않는다. 근래 불거진 거짓말(그의 표현으론 ‘불분명한 기억’) 외에도 ‘포장’과의 괴리라는 기존 문제가 있어서다. 문재인 대통령과 책을 낸 적이 있는 김인회 변호사는 ‘대법원장 실종’이란 표현을 쓰며 “법원의 사소한 변화들만 있었을 뿐”(『김인회의 사법개혁을 생각한다』)이라고 했다. 비전도, 능력도 부족하다는 얘기다.

근본적으론 태생적 한계일 수 있다. “빚을 진 사람은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리를 하게 돼 있다. 인간의 본질적 속성상 자신과 조직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갖고 집중할 것”(박준영 변호사)이기 때문이다. 김 대법원장은 그냥 빚도 아닌 큰 빚을 졌다. “촛불혁명이 없었더라도 문 대통령은 탄생했겠지만 촛불혁명이 없었다면 김 대법원장은 없었을 것”(김인회)이다.

이후 기이할 정도로 특정 인맥 법관들이 요직(영장판사 포함)을 차지했고, 현 정부 ‘블랙리스트’ 관여 혐의를 받는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영장이 기각됐는데, 그 사유가 “김 전 장관의 위법성 인식이 다소 희박해서”인 시대가 됐다. 권력자들에 대한 재판은 관대하거나 한없이 늘어졌다.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민주당이 김 대법원장의 측근을 추천할 때 그가 노무현 청와대에서 일한 민변 변호사를 추천하는 ‘우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사법농단’ 사건을 질질 끌어 검찰 수사를 자초했고, 그 결과 100여 명이 넘는 판사는 ‘적폐 청산’ 재판으로 몰아넣었다. “검찰의 사법부에 대한 견제는 그야말로 ‘기회 있는 대로’ 시도되는데”(양삼승 변호사), 기회를 떠안긴 격이었다. 더 나아가 이제는 여당 의원이 “심한 모욕감”(이수진)을 느껴도 탄핵소추당할 처지가 됐다.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왔음’이란 메모를 남긴 양승태 대법원(코트)은 그래도 법원을 위한 정책(상고법원)이란 목표가 있었다. 김 대법원장은 자신 또는 자기 진영의 ‘자리 획득’ 외에 무엇이 있나 싶다. 그는 다시 봐도 대법원장감은 아니다.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