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영준의 시시각각

같은 말을 왜 또 사려 하는가

중앙일보

입력 2021.02.0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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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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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평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은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고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더 나아가 북·미 정상회담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사실까지 전했다. 세간엔 북한이 핵을 버리고 대외 개방으로 전환할 것이란 기대가 넘쳐났다. 그 무렵 북한과의 협상에 깊이 관여했던 전직 고위 당국자 A를 만났더니 “아직 진실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며 성급한 판단을 경계했다. 2008년 6월의 경험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은 6자회담 불능화 합의의 일환으로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전 세계가 CNN 중계로 지켜봤다. 그러자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던 워싱턴 강경파의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냉각탑이 없으면 원자로를 가동하지 못하고 핵폭탄 원료를 더 이상 뽑아낼 수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북한 비핵화 의지 있다”는 문재인
두 번 속지 않는다는 바이든 행정부
첫 단추부터 삐걱이는 한·미 공조

하지만 그 뒤 비핵화 협상은 검증이란 ‘악마의 디테일’에 걸려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북한은 6자회담의 판을 깨고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했다. 위성으로 살펴보니 냉각탑 대신 인근 구룡강 물을 끌어들여 냉각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재가동을 위한 방책을 마련해 놓고 폭파 쇼를 했다는 의미다. 대북 협상에 임했던 사람들의 실망과 분노는 말로 표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영변 현장에서 냉각탑 폭파를 지켜본 사람이 이번에 바이든 행정부의 동아태 차관보 대행으로 뽑힌 성 김이다. A는 냉각쇼 폭파를 ‘치팅(cheating·속임수)’이라 표현하며 “진정한 불가역적 행동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북한의 말만 믿고 의심을 풀면 안 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뒤에도 북한은 몇 차례 오바마 행정부의 뒤통수를 쳤다. 2009년 4월 오바마 대통령이 체코 프라하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역설하려던 찰나에 장거리 미사일을 쏘아올리고 한 달 뒤 2차 핵실험을 했다. 2012년 북·미 간 2·29 합의는 잉크도 마르기 전인 4월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휴지 조각이 됐다.

대북 정책과 관련, 오바마 행정부 사람들은 “같은 말(馬)을 두 번 사지 않는다”는 영어 속담을 입에 달고 다녔다. 바이든 본인도 그렇거니와 새로 구성된 워싱턴 외교안보 라인의 주축은 오바마 시절 일했던 사람들이다. 트럼프 시절의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비핵화 성과 없이 북한에 시간을 벌어주고 김정은의 위상만 높여준 리얼리티 쇼라고 보는 배경엔 오바마 시절 겪었던 경험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새해 들어 보다 분명해진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연초의 북한 당대회에서 확인된 핵 증강 노선이 그 하나고, 그에 아랑곳없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는 한국 정부의 신심(信心) 혹은 일편단심이 나머지 하나다. 북한 당대회 발표문에서 핵 증강은 36차례 언급됐는데 비핵화는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분명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지금 바이든과 바이든 행정부 사람들에게 트럼프 시절의 협상 방식을 되살리자고 하는 건 “한 번 산 말, 두 번 왜 못 사나”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한·미는 첫 단추부터 삐걱거릴 것이다. 미국뿐이 아니다. 중국 외교부 발행의 월간지조차 “북한의 핵보유 의지가 점차 노골화·명문화됐다”며 북·미 정상회담 등 지난 3년의 외교를 ‘허다실소(虛多實少)’로 평가했다. 이게 국제사회의 상식이다.

대화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드는 예술이라고 한다. 의지가 없는 상대방이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때로는 강하게 압박해 의지가 돋아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냉철한 현실에 바탕한 전략적 사고의 뒷받침 없이 상대방이 한번 약속한 것이니 믿고 보자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국가의 운명을 그런 믿음에 맡길 수는 없다. 예로부터 “사람이 너무 착하면 남들이 속이고, 말이 온순하면 사람이 올라탄다(人善被人欺 馬善被人騎)”고 했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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