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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이성계가 왜구 무찌르고 조선 개국 꿈 드러낸 운봉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양심묵의 남원 사랑 이야기(10)

‘이성계의 꿈이 시작된 운봉은 예사롭지 않은 터전’.

전북 남원은 크게 평야부와 산간부로 나뉜다. 이를 구분하는 것이 백두대간으로 금남 호남정맥을 따라 이어지는 고남산, 방아산, 주지산,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이 경계로 서쪽은 해발 200m 내외의 평야를 이루고 동쪽 산간부는 해발 400m 이상의 고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남원 동부 산악권의 중심인 운봉은 다양한 문화가 태동하고 발달해 온 곳으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급부상한 기문 가야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운봉이다. 또 판소리 동편제의 거두인 송홍록·송만갑·이화중선 등의 고향으로 ‘판소리 동편제의 탯자리’라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운봉은 흥부전의 무대이며,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라와 백제가 아막성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 시대 거문고 명인 옥보고는 운봉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50년간 거문고를 연구해 상원곡(上院曲), 중원곡(中院曲), 하원곡(下院曲) 등 30곡의 새로운 악보를 만들어냈다. 조선 중기의 『정감록(鄭鑑錄)』에서는 전쟁이나 재난으로부터 안전한 우리나라 10승지 중 하나로 남원 운봉의 동점촌(銅店村) 주변 100리를 꼽은 바 있다.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에 거둔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황산대첩비지(좌)와 어휘각. 황산전투에 참여했던 이성계가 팔월수와 종사관의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고 하는데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 [사진 양심묵]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에 거둔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황산대첩비지(좌)와 어휘각. 황산전투에 참여했던 이성계가 팔월수와 종사관의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고 하는데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다. [사진 양심묵]

이렇게 운봉에 관한 다양한 출처나 자료를 접하다 보니, 그 어느 지역보다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음을 알 수 있었다. ‘운봉면= 새로운, 시작’이라는 단어가 연상될 만했다.

운봉에 얽힌 고려와 조선의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고려는 474년간 유지해오다 1392년 공양왕 때 이성계에 의해 멸망한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다 보니 유독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우왕이 재위한 14년간 무려 378회의 외침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우왕은 삼남 지방을 노략질하며 백성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왜구를 섬멸할 장수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로 임명하고 왜구를 물리치도록 했다.

그 무렵 함양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구는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운봉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장차 광주의 금성에서 말을 먹여 북상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고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진영을 살피고, 운봉 고남산 정산봉(鼎山峰)에 올라가 지리를 파악한 뒤 적과의 싸움에 대비했다.

그리고는 운봉과 인월의 경계인 황산 아래 호리병 모양의 협곡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전투에서 이성계는 이지란과 합작으로 적장 아지발도를 활로 쓰러뜨리고 고려군의 대승을 이끈다.

왜구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느냐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에는 “냇물이 모두 붉어 6, 7일 동안이나 빛깔이 변하지 않으므로, 물을 마실 수가 없어 모두 그릇에 담아 맑기를 기다려 한 참 만에야 마시게 되었다. 말을 1600여 필을 얻고 무기를 얻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했다”고 기록돼있다. 이 싸움을 우리는 지금까지 ‘황산대첩’이라고 부른다.

복원된 황산대첩비(좌). 파비각 안 본래의 황산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우).

복원된 황산대첩비(좌). 파비각 안 본래의 황산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우).

황산 싸움에서 크게 승리를 거둔 이성계 장군은 개성으로 가기 전 전주에 들러 전주 이씨 종친들이 마련한 승리 축하연에 종사관 정몽주와 함께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위세가 해내에 떨쳐 고향에 돌아왔네. 어떻게 하면 용맹스러운 군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 수 있을까?”라는 시 한 수를 읊었다.

그런데 이 시가 무슨 시인가. 한나라 유방이 숙적 항우를 물리치고 사람들을 모아 대연회를 베풀며 장수들을 얻어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읊은 시 ‘대풍가(大風歌)’아니었던가.

이성계 역시 이때 대풍가를 읊으면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포부를 한껏 드러냈다. 시가 끝나자 정몽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개성으로 떠나며 장차 일어날 앞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황산 싸움의 승리는 결국 그에게 ‘새로운 꿈, 새로운 세상 조선 건국’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 발판이자 꿈을 이룬 요새로 작용했다.

운봉과 인월의 경계인 람천의 피바위(좌). 황산에서 바라본 운봉의 들녘. 국악의 성지와 황산대첩비지, 고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우).

운봉과 인월의 경계인 람천의 피바위(좌). 황산에서 바라본 운봉의 들녘. 국악의 성지와 황산대첩비지, 고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우).

조선 건국의 교두보가 된 곳이 바로 남원 동부 산악권의 중심 운봉이다. 여러모로 예사롭지 않은 생명력을 내뿜는 이곳 운봉에는 지금도 이성계 장군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황산대첩비지를 비롯해 국악의 성지, 지리산 허브벨리, 백두대간 생태공원, 운봉향교, 고남산, 바래봉, 서어나무 숲 등 자연과 역사가 교차하는 현장이 고루 분포돼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요즘 새로운 꿈, 포부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면 조선 건국의 시발점이 될 만큼 특별한 생명력을 지닌 운봉에 와 그 기백과 기상을 함께 누려볼 것을 추천한다.

마치 나 혼자만 아는 보물을 찾듯 어떤 꿈틀대는 기운과 이상을 지리산권 중심 운봉 어느 한 어귀에서 발견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남원시체육회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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