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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오래된 식품 비우고 행복감 채우는 ‘냉장고 파먹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20)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을 맞았던 어릴 적 일이 생각난다. 나는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있나 궁금했을 뿐인데 말이다. 더 야속한 건 문이 열리고 얼마 지나면 어김없이 소리를 내는 알림음 녀석이다. 구원의 요청이라도 보내는 듯 요란하게 엄마를 불러댔다.

내 기억 속에 우리 집 냉장고는 엄마의 전유물이었다. 마치 종부가 곳간 열쇠를 쥐고 종갓집의 실권을 행사하는 것과 비슷했다. 우리 집에서는 냉장고 문을 자주 여닫는 것은 금기였다. 미루어보건대 전기세가 많이 나간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였을 테고,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냉장고가 자식에게조차 부끄럽지 않으셨을까 추측해 본다.

냉장고 문을 자주 열면 냉장고 안의 온도가 올라가니 냉장고는 다시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가동될 것이고, 그러면 전기세가 올라간다는 엄마의 말이 맞기는 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독립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냉장고 뒤지는 것을 좋아한다. 냉동칸까지 재료를 탐색하며 오늘은 무엇을 요리해 먹을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가끔 꽝꽝 얼어있는 보물을 발견할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해동시키고 요리 한 접시로 재탄생하면, 마치 내가 연금술사라도 된 듯 뿌듯해진다.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면 ‘냉장고 파먹기’ 파티를 열고 싶은 심정이다. 냉장고 재료로 각자 요리를 해와서 먹는 ‘포틀럭 파티(potluck party)’다. 동료나 지인들을 집에 초대하면서 참석 조건은 각자의 냉장고 속 재료만으로 만든 요리를 갖고 오는 것으로 정하면 더욱 좋다.

누군가의 집 냉장고에는 시골에서 보내준 양파랑 마늘이, 아니면 친정어머니가 해준 김장김치가, 또는 남편이 낚시로 잡은 신선한 생선과 해산물이 들어있을 것이다. 다진 돼지고기처럼 요리하다 남은 재료도 많을 것이다. 냉동칸 자리를 차지한 골치 아픈 녀석을 처리할 수 있고, 여럿이 함께 먹으니 기억에 남는 한 끼가 될 수 있다.

간단한 놀이 아닌가. 누구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우리가 『노 임팩트 맨』의 콜린 배번처럼, 뉴욕에서 전기 없이 살 거나(물론 냉장고도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면 스티브 브릴처럼 뉴욕 도심 한복판의 공원에서 식용 야생초를 채집하면서 살아가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냉장고 파먹기 같은 작은 실천은 ‘쓰레기 줄이기 운동’처럼 도전해 볼 법한 프로젝트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프리건(freegan)’이라고 쓰레기통에 몸을 던져 물건이나 음식을 줍는 ‘덤스터 다이빙(dumster diving)’으로 살아가는 무리도 생겼다. 프리건은 자유(free)와 채식주의자(vegan)의 합성어, 혹은 무료(free)로 얻는다(gain)는 뜻을 가진 합성어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더럽다고만 볼 수는 없다. 무분별한 과잉생산과 소비를 반대하는 일종의 사회 운동적 성격을 가진 행위이기 때문이다. 덤스터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프리건이라 칭하고 쓰레기통을 ‘오픈 뷔페’라 말한다.

덤스터 다이빙 장면. [사진 다큐 '음식물 쓰레기의 불편한 진실(Taste the Waste) 스틸]

덤스터 다이빙 장면. [사진 다큐 '음식물 쓰레기의 불편한 진실(Taste the Waste) 스틸]

미국에서는 빅토리아 후기 시대(1800년대 후반)의 삶을 재현하며 살아가는 놀라운 부부도 있다. 이들의 활동은 친환경 운동이기보다 역사 연구의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역사 연구와 함께 소설을 쓰는 아내 세라 크리스먼과 아키비스트이자 도서관 사서인 남편 가브리엘 크리스먼(Gabriel Chrisman)의 이야기다.

워싱턴주에서 사는 크리스먼 부부는 1889년에 지어진 주택에서 살며, 모든 일상생활을 빅토리아 시대처럼 살고 있다. 마치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하다. 물론 냉장고도 사용하지 않는다. 벽돌얼음을 구매해 와 아이스박스(나무 냉장고)에 보관해 두고 사용하는데, 이들의 삶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미국 워싱턴주에서 사는 크리스먼 부부는 1889년에 지어진 주택서 살며 냉장고 대신 아이스박스를 사용한다. [사진 This Victorian Life 블로그]

미국 워싱턴주에서 사는 크리스먼 부부는 1889년에 지어진 주택서 살며 냉장고 대신 아이스박스를 사용한다. [사진 This Victorian Life 블로그]

“오늘 저녁은 또 뭐로 때울까?”
나도 모르게 ‘식사를 때운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지치고 피곤함에 찌든 일상의 연속에서 음식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지나치게 빠른 한국 사회의 속도에 적응하기 위해서 끼니도 빨리빨리 때우려고만 했다. 나도 모르게 식사마저 효율적이고 편리한 방식을 추구했다.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간편식에 저절로 손길이 갔다.

정성껏 차린 따뜻한 집밥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잘 안다. 정작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한 건데 아무거나 먹었다니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요리도 배워야 하고 재료 손질법도 익혀야 한다. 맛있게 먹는 것도,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모두 경쟁적으로 SNS에서 올리는 탓에 피로감이 배가 되었다. 식재료도 꼼꼼하게 골라야 하고, 음식도 잘 만들어야 하고, 플라스틱도 줄여야 하고, 여기저기 쏟아지는 정보는 계속해서 나를 압박했고 지켜야 할 것은 많아졌다. 결국 피로에 지친 나는 ‘편의’에 굴복하고 말았다. 현명한 소비의 판단력은 무뎌지게 되었고, 열정은 얼어붙어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

이러한 나의 소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결혼하고 가족을 꾸리면서부터다. 한 끼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요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요리에 관심이 생기자, 처음에는 요리 자체만 몰두했다가 건강한 식재료를 고르는 법, 남은 재료를 보관하는 법까지 관심이 넓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생각이 바뀌자 정보의 홍수에서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해외 토픽에 나오는 실천 운동이 모두 대단해 보이지만,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냉장고 파먹기를 해 오래된 식료품은 될 수 있는 대로 비우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 냉장고는 비워가지만 대신 행복감이나 가치 있는 것으로 채워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냉장고 파먹기를 하기 위해서는 냉장고를 잘 정리해야 하며, 올바른 식재료 보관법을 아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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