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어, 냉장고 아니네?…김치냉장고에 숨은 과학

중앙일보

입력 2021.01.05 10:00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19)

우리 선조는 겨울이 되면 김장독을 땅속에 묻었다. 영하의 날씨에 김치가 얼면 먹을 수가 없고, 반대로 온도가 너무 높으면 빨리 쉬기 때문이다. 적정한 온도에서 2~3주 동안 김치를 숙성시켜야 제 맛이 난다. 김치의 맛을 내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산균의 활동인데, 영하 1℃를 유지하면 유산균이 김치를 맛있게 만들어준다고 한다. 유산균이 낮은 온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유산균이 너무 많아져도 김치에서 신맛이 나므로 적정 온도를 유지해주면 그 수가 늘지 않는다. 김치에 관한 각종 연구 결과를 보아도 김치의 숙성을 파악할 수 있는 척도는 산도(PH)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선조는 땅속에 김장독을 묻은 후 짚으로 그 주변을 움집처럼 만든 ‘김치광’을 사용했다. 한 겨울철 온도가 영하 10℃ 이하로 떨어져도, 땅속 30㎝ 정도의 깊이에서는 영하 1℃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바로 김치 유산균이 활동하는데 가장 적정한 온도이다. 김치광은 보통 부엌 뒤에 만들어 사용했는데, 주로 경기도나 충청도 지역에서 많이 이용했다. 자주 드나들기 편하게 거적문도 설치해서 집 형태로 만들었다. 지열을 이용해 김장독이 얼지 않게 하고 움집을 만들어서 바람과 눈 막이 역할을 했다.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의 김치광(1985). [사진 황헌만 / 『옹기』, 열화당(2006)]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리의 김치광(1985). [사진 황헌만 / 『옹기』, 열화당(2006)]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삶의 지혜 덕분에 우리는 겨우내 신선한 김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김치냉장고가 옹기와 김치광의 맥을 잇고 있다.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냉장고가 탄생한 것이다. 김치냉장고는 김장독의 핵심원리인 온도를 정확히 파악해서 현대 기술로 구현했다.

김치냉장고는 땅속에 묻은 장독과 유사한 환경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 온도를 감지하는 센서를 통해 일정 온도를 유지한다. 김치를 가장 맛있게 보관할 수 있는 온도인 영하 1℃를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 일반냉장고는 다양한 식품을 함께 보관하기 때문에 자주 여닫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바깥 공기가 들어가면서 냉장실 온도가 오르락내리락한다. 일반냉장고 내부는 평균 5℃이다. 김치 보관용 냉장고 칸이 따로 필요한 이유이다.

김치의 숙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포를 측정하는 센서도 개발되었다. 김치의 숙성 정도를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기술은 ‘김치냉장고의 발효 및 저장 기능 제어 시스템’이라는 특허로 출원되었다(1989년 삼성전자). 시간에 따른 기포 발생량의 변화를 측정해 발효 곡선을 그리고, 그것을 분석해 온도 제어 알고리즘을 만들어 최적의 김치 발효 상태를 조성하는 것이다.

게다가 김치냉장고는 김치를 격리해 다른 음식에 김치 냄새가 배는 것도 방지할 수 있게 해줬다. 김치의 강한 냄새가 냉장고 안의 다른 식품에 배어드는 문제가 당시 생활의 큰 불편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김치의 익힘과 보관, 탈취기능을 특화한 냉장고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김치냉장고는 1984년 금성사(현 LG)가 GR-063이라는 모델명으로 출시한 제품이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단독주택에 거주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김치냉장고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집 마당에 김장독을 쓰는 집이 여전히 많아서 김치냉장고의 이용률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내 어린 시절, 아파트로 처음 이사를 간 뒤에도 어머니께서는 한동안 베란다에 김장독을 두셨던 기억이 있다(서울 1991년 즈음). 김장독은 내가 축구공으로 깬 뒤에야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췄다(고의가 아닌 사고였다).

시간이 흘러 다른 기업에서도 앞 다투어 김치냉장고를 출시했으나,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1995년 만도기계에서 나온 ‘딤채(CFR-052E)’라는 브랜드였다. 제품 자체의 기능도 우수했겠지만, 당시 아파트 붐에 힘입어 성공했으리라는 사회적 배경도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잠실을 비롯한 서울 강남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됐고, 1990년대 들어 분당·일산·평촌 등 대규모 아파트 지구가 조성되었다. 아파트 중심의 주거문화가 김치냉장고 대중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2018년 기준), 현재 우리나라 김치냉장고 시장 규모는 연간 1조 5000억 원이 넘는 수준으로 판매 대수는 120만대 정도에 달한다.

김치냉장고 광고.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소장/김한용 사진연구소 제공]

김치냉장고 광고.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소장/김한용 사진연구소 제공]

냉장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일본의 음식인류학자인 아사쿠라 도시오 교수(Asakura Toshio, 리츠메이칸 대학)를 모신 일이 있다. 그는 1979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연구해 왔다. 한국의 부엌과 음식문화에 관심을 가졌는데, 음식문화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특히, 일본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인 이토 아비토(Ito Abito)와 함께 전라남도 진도의 옹기에 관해 대대적으로 조사하기도 했다.

그는 1990년대에 일본 오사카 국립민족학박물관에 근무하던 시절, 한국의 김치냉장고를 수집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다양한 종류의 김치냉장고를 찾았는데, 결국 일본으로 가지고 간 것은 위의 사진과 같이 김장독 모형의 제품이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직사각형의 김치냉장고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기술이나 성능보다는, 한국 고유의 김장독 전통을 계승한 제품을 찾으려던 게 아니었을까.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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