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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영국 유학시절 친구들 방서 풍기던 나라별 냄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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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17)

영국 유학 시절의 이야기다. 런던 올림픽이 열렸던 해로 2012년 때였다. 나는 칼리지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었다. 우리 층은 외국인 대학원생만 썼는데 총 7명이었다. 국적도 서로 다르고 전공도 다양했다. 내가 속한 칼리지는 1838년에 설립됐다.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건물은 고풍스러웠지만, 시설은 낙후돼 불편했던 게 사실이다. 아름다운 전통을 유지하려면 불편은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더럼대학교의 세인트힐드앤베드 칼리지. [사진 더럼 대학]

더럼대학교의 세인트힐드앤베드 칼리지. [사진 더럼 대학]

학기 중에는 칼리지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방학이 문제였다. 식당도 쉬기 때문에 각자 식사를 해결해야만 했다. 물론 기숙사에는 층마다 공용 주방에서 요리할 수 있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냉장고도 한쪽에 마련돼 있었다. 다행히 방마다 소형 냉장고가 갖춰져 냄새나는 식재료는 따로 보관했다. 내 경우 김치를 방 냉장고에 따로 보관했다. 혹여 냄새로 주위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들 방에 놀러 가면 방마다 특유의 냄새가 났다. 각종 향신료와 양념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중국의 국민 소스로 유명한 라쟈오장(辣椒酱)을 접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고(창업주 타오 화비(陶华碧)여사의 사진이 포장지에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네팔 친구의 방에 들어가면 찬장에 있는 큐민(cumin) 냄새가 항상 코를 자극했다.

부피가 큰 채소와 같은 식재료는 주방 냉장고에 보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암묵적으로 냉장고 칸의 주인이 생겼지만, 그래도 같이 사용하다 보니 불편한 일도 겪기 마련이었다. 상한 재료를 끝까지 치우지 않는 친구도 있고, 허락 없이 재료를 슬쩍 쓰는 녀석도 있었다. 가끔 나도 빌려 쓰는 경우가 생겼다. 칼리지에 한국인이라곤 나밖에 없으니 인색하게 보일 수 없고, 그렇다고 마냥 관대해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인트힐드앤베드 칼리지 기숙사 방 내부. [사진 심효윤]

세인트힐드앤베드 칼리지 기숙사 방 내부. [사진 심효윤]

근래에 한국으로 온 유학생 부부를 만나면서, 갑자기 나의 유학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켰나 보다. 현재 박사 과정으로 전남대학교에 유학을 온 응웬 반 띤(Nguyen Van Tinh)씨는 아내와 7살의 딸과 함께 한국에 왔다. 반 띤 씨 가족은 기숙사를 이용했던 나와는 달리 학교 부근의 단독주택에서 거주한다. 집 주변에는 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는 원룸촌이고,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학 주변의 주택가 풍경이다.

부부의 고향은 베트남 중부의 닥락(Dak Lak) 지역이다. 닥락은 기후가 따뜻해 커피 재배 지역으로 유명하다. 반 띤 씨가 내게 소개해준 요리는 고향에서 주로 결혼식이나 잔치 때 먹는 음식이었다. 반호이(Bánh hỏi), 넴란(Nem rán), 가보소이(Gà bó xôi)인데, 청혼과 약혼식의 예물에 쓰이거나 결혼 잔치와 같이 특별한 날에 차리는 음식이란다. 우리네 이바지 음식(예단 음식)과 비슷한 풍습이다.

베트남 혼례로 보통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예물(혼수함)을 보낼 때 쩌우까우, 차, 반호이 떡, 약간의 돈, 귀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를 함께 보낸다. 특히, 쩌우까우는 담쟁이과로 나무에 붙어 덩굴째 기어 올라가는 식물인데, 쩌우까우처럼 부부가 서로 의지하며 백년해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 띤씨 부부도 결혼할 때 음식을 모두 준비했다고 한다.

함께 요리하는 반 띤씨 부부. [사진 광주대학교, 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함께 요리하는 반 띤씨 부부. [사진 광주대학교, 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반호이, 넴란, 가보소이 요리. [사진 광주대학교, 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반호이, 넴란, 가보소이 요리. [사진 광주대학교, 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아내 튀응안씨는 한국에서 베트남 음식을 요리하는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다고 했다. 처음 왔을 때는 정보가 부족했지만, 먼저 정착한 분에게 도움도 받고 베트남 재료 구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근처에 아시아 식품 상점도 있고, 인터넷에서 주문하면 빵, 라이스 페이퍼, 연유도 살 수 있다고 한다. 설날에는 반쯩(Bánh chưng, 베트남 설음식)을 살 수 있고, 바나나 잎도 살 수 있어서 이제는 베트남 음식을 요리하는 데 편해졌다.

“저는 냉장고에 고기와 생선을 많이 얼려두지 않아요. 집 근처에 말바우 시장과 슈퍼마켓이 있어 장을 자주 보는 편이죠. 베트남에는 시장을 매일 보는 습관이 있어요. 우리 시어머니는 매일같이 시장에 가시죠. 시장에 갈 때마다 신선한 음식을 사서 그날 바로 먹곤 해요. 아마 냉장고보다 더 좋을 거예요. 제가 보기에 한국 사람은 온종일 일하느라 정말 바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시장에 가서 일주일 치 식료품을 사는 거죠. 친구들 보면 보통 주말에 한주 치 음식을 몰아 요리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들 바쁘니까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신선한 음식을 먹는 게 훨씬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냉장고를 보여줬는데 죽순이 눈에 띄었다. 베트남에서는 죽순과 돼지고기, 소고기가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서 요리에 자주 사용한다. 죽순은 비싼 재료에 속하고 제사음식으로도 자주 올려지는 재료다. 친정엄마께서 특별히 고향에서 보내주셨다고 했다. 바로 옆 담양이 대나무가 유명하다고 알려주었더니 베트남 것과는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즐겨 먹는 음식 중에 닭고기 죽순 국수(Miến măng gà)가 있는데, 베트남에 계신 어머니께서 죽순을 건조해 보내주셨어요. 죽순은 한국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한국의 죽순은 얇고 속이 비어 있죠. 베트남 죽순은 매우 조밀하고 두껍습니다. 닥락은 특히 죽순이 맛이 좋아 어머니께서 늘 챙겨주시죠. 어머니 덕에 우리는 고향을 기억하고 고향의 맛을 한국에서도 먹을 수 있답니다.”

아무리 현지에서 적응을 잘해도 유학생은 외로움을 느끼고 고향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가 확산하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명절이나 연휴에 친구들과 같이 모여 음식도 먹고, 시간을 함께 보내며 향수를 달래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타지에서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는 부부에게 고향 음식의 한 끼는 큰 힘이 된다.

친구들이 보내준 마법 상자. [사진 심효윤]

친구들이 보내준 마법 상자. [사진 심효윤]

다시 내 과거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어느 날 친구들이 소포 꾸러미를 보내줬다. 영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신제품 라면을 포함해 귀한 팩 소주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역시 소주는 그 맛을 모르는 외국인보다는 한국 지인과 함께 나누는 게 인지상정이다. 선배 박사 부부께 바로 연락을 드렸다. 얼른 집으로 건너오라며 안주는 준비해 주겠단다.

“효윤아, 이게 뭔지 아니? 테스코에서는 구할 수 없지. 여기에선 정육점에서도 고기를 한국처럼 얇게 썰어주질 못해요(오겹살처럼 두꺼운 포크벨리는 구하기 쉽다. 오븐에 구우면 나름 맛있지만, 한국식 삼겹살과 다르다). 그런데 여기 있으니깐 대패 삼겹살 당기지 않냐? 네가 소주를 공수해 왔으니 내가 특별히 보여주마. (빵 커터기를 꺼내서 삼겹살을 얇게 썰며) 짜잔! 어때? 대패 삼겹살이랑 똑같지?”

내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삼겹살이었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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