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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기피증 딛고 우승한 릴보이 “‘쇼미9’로 상담받은 기분”

중앙일보

입력

‘쇼미더머니9’ 우승자 릴보이는 “음악에 대한 순수함을 되찾게 됐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쇼미더머니9’ 우승자 릴보이는 “음악에 대한 순수함을 되찾게 됐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안정적인 박자감. 정확한 발음. 넓은 스펙트럼. 지난 18일 막을 내린 Mnet ‘쇼미더머니9’(이하 쇼미9)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한 릴보이(오승택ㆍ29)가 지닌 무기들이다. 래퍼로서 가장 기본이지만 아무나 갖출 수 없는 덕목을 고루 겸비한 그는 결승전에서 최종 금액 2198만원을 기록해 2위 머쉬베놈(1047만원)을 큰 폭으로 따돌렸다. 시즌 4 이후 5년 만의 재도전으로 ‘영 보스’에 등극하면서 ‘감성 랩’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욕설과 디스, 허세와 돈 자랑 없이도 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5년 만에 재도전으로 ‘영 보스’ 등극 #“힙합 아냐” 비판받던 감성 랩 통해 #“순수한 팀원들 덕분에 초심 되찾아 #아이돌처럼 힙합 파이도 더 커졌으면”

22일 서울 삼성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아직 실감이 안 난다”고 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격상되면서 온라인 평가단과 사전 녹화로 경연을 치렀고, 성대한 축하 파티는커녕 함께 고생한 사람들과 밥 한 끼 먹기 어려운 상황 탓이다. “현장 관객이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그래서 좀 더 다양한 무대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호응을 유도하려면 신나는 노래를 해야 하는데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었거든요.” 그가 결승곡으로 택한 ‘크레딧’은 지난 2개월 동안의 여정을 함께 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내용으로 경쟁보단 화합에 어울리는 분위기다.

“관객 없어 아쉽지만 덕분에 다양한 무대”

결승전에서 프로듀서 자이언티ㆍ기리보이와 래퍼 염따와 함께 꾸민 ‘크레딧’ 무대. 릴보이는 “시계가 멈춰있는 가운데 염따 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처럼 과거 회상 공간으로 인도하는 역할이었다”며 “마지막 무대인 만큼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사진 Mnet]

결승전에서 프로듀서 자이언티ㆍ기리보이와 래퍼 염따와 함께 꾸민 ‘크레딧’ 무대. 릴보이는 “시계가 멈춰있는 가운데 염따 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처럼 과거 회상 공간으로 인도하는 역할이었다”며 “마지막 무대인 만큼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사진 Mnet]

결승전에서 로꼬ㆍ박재범ㆍ그레이와 함께 한 ‘온 에어’ 무대. 시즌 4에서 로꼬ㆍ박재범과 함께 본선 1차 경연에서 ‘온 잇 + 보스’ 무대를 끝으로 탈락했던 릴보이는 “또 떨어지면 큰일이겠지만 우승을 하면 결과가 달라지는 거니까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Mnet]

결승전에서 로꼬ㆍ박재범ㆍ그레이와 함께 한 ‘온 에어’ 무대. 시즌 4에서 로꼬ㆍ박재범과 함께 본선 1차 경연에서 ‘온 잇 + 보스’ 무대를 끝으로 탈락했던 릴보이는 “또 떨어지면 큰일이겠지만 우승을 하면 결과가 달라지는 거니까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Mnet]

지난 5년간 그를 괴롭혔던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서도 한결 자유로워졌다. 2011년 루이와 함께 힙합 듀오 긱스로 데뷔한 그는 ‘오피셜리 미싱 유’와 소유와 함께 부른 ‘오피셜리 미싱 유, 투’가 연이어 히트하면서 “힙합이 아니다” “돈 벌려고 만든 음악” 등의 비난을 받아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우리는 정말 순수하게 만든 음악인데 계산적으로 보는 시선이 싫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만 떳떳하면 되는데 생각이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2년 전부터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그는 “그간 상담은 안 내켜서 거절했는데 ‘쇼미9’에 나와서 ‘자기팀’ 팀원들이 이야기를 너무 잘 들어줘서 상담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자이언티ㆍ기리보이 등 프로듀서는 물론 원슈타인ㆍ칠린호미ㆍ스카이민혁 등 팀원들에게서 얻은 힘은 컸다. “기리보이는 음악 처음 시작할 때 첫 크루를 함께 했고, 자이언티 형도 공연 다니면서 만나서 그런지 너무 편했어요. 비트 메이커 슬롬도 저랑 계속 같이했던 친구고. 시즌 4 때는 저를 증명하기 위해 의욕만 앞섰는데 이분들이 옆에서 멘탈 케어를 많이 해줬죠.” 특히 남다른 케미로 화제가 된 원슈타인에 대해서는 “제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그 순수함을 죽을 때까지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덕분에 저도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죠.”

“원슈타인, 예전 내 모습 보는 것 같아”

세미 파이널에서 ‘배드 뉴스 사이퍼 Vol.2’로 강렬한 래핑을 선보인 릴보이. [사진 Mnet]

세미 파이널에서 ‘배드 뉴스 사이퍼 Vol.2’로 강렬한 래핑을 선보인 릴보이. [사진 Mnet]

5년 전 “누구는 말하지/ 이런 비트는 힙합이래/ 저 새끼들은 감성팔이”(‘온 잇 + 보스’) 등 날 선 가사는 “난 모두가 잘 되길 빌어/ 이 말이 거짓말 같다 해도/ 확실한 건 더 이상 상처를 주기 싫어”(‘내일이 오면’) 등 한층 부드러워졌다. “결국 힙합은 솔직함 같아요. 제이콜이나 찬스 더 래퍼 등 제가 좋아하는 래퍼들을 봐도  자극적인 사람들이 아니에요.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죠.” ‘어바웃 타임’ 등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는 그는 “좋아하는 작품들의 잔잔하고 따뜻한 예술관을 닮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랩의 기원을 두고 시다, 설교다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는데 결국 다 메시지를 전달하고 설득하는 일인 만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에요”.

이번 ‘쇼미9’엔 기존 우승 상금 1억원과 미니 쿠퍼 자동차에 ‘뮤직 비즈니스 플랜’이라는 혜택이 추가됐다. 우승자가 자신만의 레이블을 세우고 향후 음악 활동에 보다 체계적인 지원을 하기 위함이다. 지난해 테이크원ㆍ야누 등과 함께 하프타임 레코즈를 꾸린 릴보이는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멋있게 음악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좋은 ‘포장지’가 더해진 느낌”이라고 밝혔다. “음악은 항상 열심히 만들어 왔으니 더 많은 분이 들을 수 있도록 노출이 필요한 것 같아요.” 상금으로 “국밥을 먹고 싶다”고 밝힌 그는 “좀 더 맛있는 국밥을 특으로 먹으면서 오랫동안 준비해온 솔로 앨범 작업을 마무리하고 긱스 팀 활동도 병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쇼미’로 낀 세대 돼…중간 지대 넓혀가길”

릴보이는 “코로나19로 활동의 폭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많은 래퍼들이 출연해 ‘쇼미9’가 다채로워진 것 같다”며 “한 명 한 명 캐릭터가 잘 보이게 해준 제작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릴보이는 “코로나19로 활동의 폭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많은 래퍼들이 출연해 ‘쇼미9’가 다채로워진 것 같다”며 “한 명 한 명 캐릭터가 잘 보이게 해준 제작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제 “한국 힙합의 파이가 커지는 것”이란 그의 꿈도 이뤄진 걸까. “예전보다 많이 커지긴 했지만 아직도 한참 남은 것 같아요. 아이돌 시장이 커지면서 한국 음악 시장이 커진 것처럼 힙합도 슈퍼스타가 계속 나오면 훨씬 더 커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낀 세대’거든요. 예전엔 형들이 성공해서 동생들을 이끌어주는 게 당연했는데 2012년 ‘쇼미’가 시작되면서 역전이 많이 됐어요. 더 어린 친구들이 더 성공하기도 하고 가치관 충돌도 심해졌죠.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제 또래 래퍼들은 예전 세대에 대한 리스펙도 있고 동생들이 하는 장르도 좋아하는데 다 비슷한 고민을 해요. 거창하지만 그 사이에서 중간 지대를 잘 넓혀나가는 게 ‘영 보스’의 과제인 것 같아요.”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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