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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쉬운 샌드박스만 허용하고 자화자찬하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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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2일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신청ㆍ승인 기업과 비대면 간담회를 개최했다. 과기정통부는 해당 행사에 대해 “규제 샌드박스 제도 시행 2년차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신규 신청기업과 승인 기업의 사업진행 과정의 애로사항을 논의하고, 향후 제도 운용방안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이 자리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규제 샌드 박스의 문을 두드렸지만, 2년이 되도록 심의위원회 안건에 오르지 못하거나(쓰리알코리아) 심의에서 보류(모인)된 뒤 정부로부터 ‘연락 두절’을 겪고 있는 이들이다.

쓰리알코리아 박인술 대표(화면안)가 화상투약기를 시연하고 있다. 김경진 기자

쓰리알코리아 박인술 대표(화면안)가 화상투약기를 시연하고 있다. 김경진 기자

‘쓰리알코리아’는 자판기 형태의 화상투약기를 개발한 회사다. 화상투약기는 심야나 공휴일에 약사가 화상통화로 환자의 상태를 확인 후 원격으로 자판기 속 약을 떨어뜨려 주는 약 판매기다. 이 회사는 규제샌드박스의 심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4억원을 들여 투약기를 새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심의위 정식 안건으로 선정된 뒤에도 계속 심의위에 오르지 못했다. 약사회와 복지부의 반대 때문이었다. 올 6월에 딱 한 번 상정될 기회가 있었지만, 회의 전날 ‘취소’통보를 받았다. “공적 마스크 등으로 협력해야 할 대상(약사)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안건을 논의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여당 의원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 회사 박인술 대표는 “그동안 국정감사라 안된다, 총선 앞이라 어렵다던 과기정통부가 이제는 회의가 ‘비대면’으로 진행돼 민감한 이슈는 다루기 어렵다고 한다”며 “ICT 주관 부서 맞느냐”고 말했다.

‘모인’도 하세월을 보내고 있긴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해외 송금 서비스를 출시하기 위해 ‘1호’로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했다. 그럼에도 계속 심의에 오르지 못하다가 지난해 7월에야 안건에 올랐다. 하지만 해당 서비스는 ‘심의 보류’ 판정을 받았고, 이후 이 회사는 과기정통부로부터 어떤 연락이나 절차상의 안내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정작 비트코인 등의 가상자산을 다루는 사업자에 대한 범위와 의무를 명시한 ‘특금법(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 내년 3월부터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 회사 서일석 대표는 “가상자산에 대한 법적인 근거가 없어서 규제샌드박스를 신청했는데, 규제샌드박스가 오히려 법보다 후행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모인의 서일석 대표(우측)은 2016년 열린 창업경진대회에서 블록체인을 이용한 해외 송금 아이디어로 금상을 수상했지만, 현재까지 해당 사업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 모인]

모인의 서일석 대표(우측)은 2016년 열린 창업경진대회에서 블록체인을 이용한 해외 송금 아이디어로 금상을 수상했지만, 현재까지 해당 사업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 모인]

규제 샌드박스는 모래 놀이터처럼 기업이 자유롭게 혁신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있도록 임시 허가(규제가 없는 경우)를 내주거나 실증특례(규제가 있는 경우)를 통해 예외적으로 사업을 허용해 주는 제도다. ‘모인’처럼 제도가 기술 발전 속도를 못따라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서비스나, ‘쓰리알코리아’처럼 기존의 법과 이익단체 등의 반대로 사업을 시작하기 힘든 경우라도 제한된 범위내에서 일단 신기술과 새로운 서비스를 테스트해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과기정통부는 그동안 이런 골치 아픈 후보들은 아예 심의조차 하지 않으면서 숫자로 된 실적만을 홍보하는 데 급급했다. 이날도 과기부는 “지난 2년간 79건의 규제 특례를 승인했고 42건의 신기술ㆍ서비스가 출시됐으며, 해당 기업의 매출액이 57억원에서 159억원으로 늘었다”고 자찬했다. 쉬운 문제만 골라서 시험을 본 뒤 점수가 높다고 자랑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과기정통부가 두 회사에 대한 규제샌드박스 심의를 미루고 미룬 사이 화상 투약기 기술은 중국에 뒤처진지 오래고, 블록체인 해외송금 기술 역시 미국ㆍ싱가포르ㆍ일본 등에 뒤처진 상태다. 과기정통부가 진정 '향후 제도 운영 방안 개선'을 원했다면 이런 회사들에 먼저 초대장을 보냈어야 했다.

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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