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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람사전

강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정철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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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서 나를 꺼내는 것.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어떻게 살래? 묻는 것. 유명인사 에피소드 이것저것 수집해 병풍처럼 주르륵 펼쳐 보이는 강연은 박수 치고 나면 뭔가 허전하다. 뭔가 허무하다. 주어와 술어가 따로 놀기 때문이다.

『사람 사전』은 ‘강연’을 이렇게 풀었다. 나는 글쓰기 강연을 한다. 나는 이렇게 썼는데 너는 어떻게 쓸래? 묻는 강연이다. 강연 중심에 나를 놓는 것. 나는 이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믿는다.

지난해 제법 큰 강연 무대에 섰다. 이틀에 걸친 이 행사엔 강사가 수십 명, 외국에서 날아온 강사도 여럿 있었다. 같은 시간 다른 방에서 강연 세 개가 한꺼번에 오픈되는 형식. 내 객석이 썰렁하면 자존심 다칠 수도 있는 상황. 조마조마 무대에 올랐다. 꽉 찼다. 눈이 신나니 입도 신나게 일을 했다.

사람사전 12/9

사람사전 12/9

강연 직후 여자 사람 하나가 책을 내밀며 사인을 요구했다. 사인하는 내 손끝을 보며 그녀가 한마디 한다. 오늘 강연 좋았어요. 이런 반응 예상했다는 듯 나는 여유로운 웃음을 건넸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한마디로 충분했는데, 그녀는 한마디 보탠다. 책보다 훨씬 좋았어요. 나, 상처받았다. 하지만 남이 아니라 나를 말하는 그녀의 씩씩함이 예뻤다.

강연 듣는 사람 역시 나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 명품 강연 찾아다니기 전에, 그들 한마디에 울컥 감동하기 전에, 그들이 제시한 곳으로 내 인생을 데려가기 전에, 내 안에서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 내 목소리부터 들을 것. 세상을 만나기 전에 나부터 만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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