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1927-2015) 전 대통령의 5주기(11월 22일) 이틀 뒤 찾아간 서울 동작구 상도동 사저 주변은 고요했다. 마침 동네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길래 잠시 말을 걸어봤다. 주민들은 박정희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여전히 친근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이야기를 꺼내자 "50년 동안 김 전 대통령의 이웃으로 살았다"는 한 주민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이 정부 들어 이승만·박정희·김영삼 대통령의 업적을 죽이고 있다. '북한 2중대'라는 이 정부 사람들은 자기들 하고 싶은 정책만 몰아간다. 다른 국민의 의견은 무시하는 독재 행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죽은 지 오래됐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지금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 입에서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현상은 분명 비정상적이다. 김영삼 민주센터 김덕룡(79) 이사장을 만난 이유다. 그는 호남(전북 익산) 출신으로 김 전 대통령을 옆에서 보좌한 대표적 상도동계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문재인 대통령 지지를 선언해 놀랐다. 2017년 대선 이후 평통 수석부의장을 지냈지만, 줄곧 무소속 신분이다.
-오늘 만난 상도동 주민이 "민주주의는 죽었다"고 하더라.
"민주화운동 할 때의 초심이 가슴 속에 남아 있는지 반성하게 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오만·독선·위선·부패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목숨 건 단식 투쟁을 했던 YS가 꿈꿨던 민주주의가 이런 모습이었나,
"국민이 자신의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받는 나라였다. 1993년 첫 문민정부 탄생 이후 95년 민선 지방자치가 부활하면서 제도적으로 민주화가 실현됐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완성품이 없다.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후퇴하고 훼손될 수 있으니 눈을 뜨고 항시 지켜봐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여론을 존중하고 국민의 목소리를 국정에 잘 반영했다.
"경청의 달인이었다. 신상필벌이 분명했고 부정부패에 단호했다. 차남 관련 의혹이 제기되자 당시 검찰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왜 빨리 구속 안 하느냐'고 혼냈을 정도다."
-민주화 이후 우리 민주주의가 언제부터 흔들렸나.
"이명박 정부 후반, 특히 박근혜 정부 들어 권위주의로 돌아가면서 민주주의의 기본이 흔들렸다. 박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에 대한 소양·신념·철학이 특히 부족했다. 민주주의를 후퇴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문재인을 지지했다."
-그런데 이 정부는 '불통''독재'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는 개헌을 약속받고 지지를 선언했다. 평통 수석 부의장이었지만 대통령과 대화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선한 것은 분명한데 지도자 역량, 즉 리더십에는 회의적이다. 지도자는 때로는 결단해야 하고 야당을 만나 협상하고 양보도 해야 한다. "
-불리하면 침묵하니 좌파 인사조차 '임금님'이라 비판한다.
"권력이 제일 빠지기 쉬운 것이 독선과 오만이다. 숫자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민주주의 기본에서 일탈한 것이다. 신상필벌 인사도 아쉽다. 부동산 정책만 보더라도 집 있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니 집 없는 사람도 고통받는다. 이 정부의 문제 해결 능력을 국민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 국민은 지혜로운데 안타깝게도 지도자 복이 부족하다."
-가덕도 신공항 매표 논란 등 민주주의가 포퓰리즘으로 변질하고 있다.
[장세정의 시선] #상도동은 김영삼 민주주의 '성지' #상도동 주민 "문 정부 독재" 비판 #'소통의 달인 YS'는 여론 경청해 #"문 대통령 지도자 역량엔 회의적" #김덕룡 "협치의 정치하라" 충고 #"불통 임금님" 비판듣는 대통령 #김영삼의 소통 리더십 배워야
"맘대로 '입법독재'하라고 4·15 총선에서 거대 여당을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국익을 우선하고 여야 합의를 통해 국민이 살기 좋도록 정치하라는 주문이었다. 지금처럼 집권에 유리한 표 얻기 정책만 펴면 결국 나라가 망하고 국민에 버림받을 것이다."
-문 대통령에게 쓴소리 한마디 한다면.
"YS는 정직하고 솔직한 분이었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사과할 만큼 용기 있는 지도자였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했다. 야당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자세를 일관했다. 서거 5주기를 맞아 YS 리더십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민주주의는 설득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도 협치를 통해 타협의 정치를 해야 한다."
김영삼과 문재인은 같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경남고 선후배 관계다. 문 대통령 '덕분에' YS의 민주적 소통 능력이 더 빛나고 재평가 기회를 얻은 것은 역설적이지만 다행이다. '불통'이란 비판을 받는 문 대통령이 YS의 소통 리더십을 진지하게 공부하면 어떨까.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