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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안 보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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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 청구와 직무정지 명령을 내린 이튿날인 25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의 페이스북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국정 1인자, 최근 한달 뭐했나 #검찰총장 직무배제 다음날 #“여성대상 범죄 단호히 대응” 페북 #김해신공항 백지화 밝힌 날 #청와대 “관계장관회의 기다려달라” #월성1호기 감사 발표한 날 #입장 안 내고 외국 정상들과 통화

“여성 폭력 추방 주간 첫날이다. 여성 대상 범죄에 단호히 대응하겠다. (중략) 우리는 오랫동안 권위주의에 길들었지만 용기를 내 인식을 변화시키고 서로를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중략).”

10시간 만에 1000여 건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인사권자로서 말 좀 하면 안 되나”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서울시장·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나” “부동산이 국민들 삶과 직결된 현재의 가장 큰 이슈인데 언제까지 아무 말 없이 침묵만 할 건가” 등이다.

‘귀청 터지게 하는 침묵’의 일상화

문 대통령의 침묵은 이제 누구나 주목하는 현상이 됐다. 이른바 ‘귀청 터지게 하는 침묵(deafening silence)’이다. 사실 문 대통령이 말 자체를 안 한 건 아니다. 거의 하루에 한두 건의 메시지를 낸다. 이날도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한국판 뉴딜, 대한민국 인공지능을 만나다’ 행사를 하며 “인공지능(AI) 시대를 활짝 열고 있는 여러분을 국민과 함께 응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현안에 대해선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사상 초유의 검찰총장 직무정지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임면권자인 문 대통령은 아무 얘기를 안 한다.  오히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의 소감으로 “개인적으로 좋았던, 혹은 감동했던 것은 (문 대통령의) 태도”라며 문 대통령이 세 시간 가까이 자리를 지킨 걸 예로 들었을 뿐이다. 그러자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위원장이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역할이란 게 과연 어떤 역할인가 묻고 싶다”고 할 정도다.

논란의 한 달, 문 대통령 무슨 일 했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논란의 한 달, 문 대통령 무슨 일 했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번만이 아니다. 문 대통령 및 청와대와 직결된 사안이 연이어 터졌음에도 그랬다. 국제행사나 뉴딜 행사에서 ‘선한 메시지’를 내는 대통령으로만 비칠 뿐 갈등 해소 등의 국정 책임자로서의 모습은 없다는 지적이다.

지난 10월 20일 감사원이 ‘월성 원전 1호기 감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월성1호기 영구가동 중단은 언제 됩니까”라는 문 대통령의 한마디로 산업부 보고서, 원전 경제성 평가 등이 조작됐다는 취지의 발표가 나오며 ‘청와대 개입 의혹’이 일었지만 문 대통령의 설명은 없었다. 발표 당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 여민관에서 룩셈부르크·이탈리아 총리, 이집트 대통령과의 통화 일정 등을 소화했다.

문 대통령이 민주당 대표였던 2015년에 만든 “부정부패 등 중대한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궐 선거를 실시하면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는 당헌 조항을 최근 민주당이 뒤집었을 때도 반응은 없었다. 지난 17일 국무총리실 산하 신공항 검증위가 사실상 ‘김해신공항 백지화’ 방침을 발표하자 세간의 시선은 다시 문 대통령을 향했지만 역시 침묵했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과나 설득하려는 노력은 했다.

민주당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에 대한 야당 비토권을 없애겠다고 나섰을 때도 문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서해상 실종 공무원의 피살사건이 알려진 날 문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는 대신 ‘디지털 뉴딜’ 행사에서 “대한민국 콘텐트 르네상스 시대를 선언한다”고 했다. 당시 아카펠라 공연도 관람했다.

그리고 24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검찰총장 직무배제를 발표했다. 1년 가까이 이어진 추-윤 갈등의 정점이었다. 이날도 청와대의 공식 입장은 “문 대통령은 법무부 장관 발표 직전 보고를 받았고, 별도의 언급은 없었다”(강민석 대변인)가 전부였다.

집권 초기와는 천양지차다. ‘적폐 청산’은 물론 검찰 특수활동비까지 예외 없이 문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이어졌었다. 당시와 차이가 있다면 이전 정권의 문제냐, 현 정권의 문제냐일 것이다. 당장 야당에선 “광 파는 일에만 얼굴을 내밀고 책임져야 할 순간에는 도망쳐버린다. 참 비겁한 대통령”(유승민 전 의원)이라고 비판한다.

대통령의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말이 없으니 다른 말들이 대신한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어차피 문재인 대통령은 허수아비일 뿐이고, 그 밑의 586 주류 세력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추미애를 내세워 그냥 막나가기로 한 거라 본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대표 시절의 문 대통령 발언이 대신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채동욱 검찰총장을 내몰던 때로 “결국… 끝내… 독하게 매듭짓는군요. 무섭습니다”였다.

대선캠프 출신 “문, 책임회피가 특징”

문제는 문 대통령의 침묵이 책임정치와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아닌 군주적 행태”라고 지적한다. 정치컨설팅 ‘민’의 박성민 대표는 “월성1호기, 신공항 등 현안마다 대통령이 입을 닫아버리면 정치적 책임을 질 주체도 실종되고 만다”고 했다.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활동한 신평 변호사도 “문 대통령의 큰 특징은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점”이라고 했다. 정치학자인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침묵은 권력의 최후 무기인가”(『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라고 물었다.

한 달 넘게 이어지는 문 대통령의 침묵에 대해 묻자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윤석열 직무배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이 입장을 밝혀 (윤석열) 징계 절차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란 말이냐.”

손국희·윤성민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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