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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행당한 사람 모습 아니다" 대법서 질책당한 2심 판결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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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의 성추행 무죄 판결을 파기환송한 민유숙 대법관의 모습. [뉴스1]

2심의 성추행 무죄 판결을 파기환송한 민유숙 대법관의 모습. [뉴스1]

"피해자다움이 나타나지 않음을 지적한 건 타당치 않다"

대법원이 성추행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꾸짖으며 파기환송했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피해자가 마땅히 보여야만 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피해자의 진술을 배척할 수 없다"며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이 나타나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밝혔다. 또한 항소심이 1심의 유죄를 무죄로 뒤집는 과정에서 적법한 증거조사도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편의점주(피해자)와 대기업 편의점 회사 직원(피고인) 간에 벌어진 강제추행 사건은 1심에서 유죄가 나왔다. 하지만 항소심에선 무죄로 뒤집혔고 대법원은 지난달 이 사건을 유죄 취지로 다시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이 강조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일까.

성추행 사건의 전말과 1심 유죄 

1심에서 피고인에게 벌금 400만원이 선고된 이 사건은 여성 편의점 점주 A씨와 편의점 회사 직원 B씨간에 벌어졌다. 평소 A씨에 호감을 갖고 있던 B씨는 편의점에 홀로 있던 피해자를 찾아가 피해자의 거부에도 머리를 만지고 목을 껴안은 뒤 얼굴에 키스를 한 혐의(강제추행)로 기소됐다.

1심 판결은 대법원 판결의 취지와 유사했다.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된 점 ▶피해자에게 허위의 신고 동기가 없는 점 ▶두 사람간의 연락이 잦았지만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고 업무상 연락이 많았던 점 ▶B씨의 범행으로 A씨가 성적수치심을 느낀 점이 고려돼 벌금 400만원이 선고됐다.

이 사진은 사건과 상관 없음. [중앙포토]

이 사진은 사건과 상관 없음. [중앙포토]

뒤집힌 1심, 2심 무죄 

하지만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에선 범행 이전에도 A씨가 또다른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혐의는 기소되지 않은 점, 그 추행이 벌어진 뒤 두 사람 간의 모습이 찍힌 폐쇄회로(CC)TV에 나온 피해자의 모습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의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했다. A씨가 피해자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항소심은 B씨가 A씨의 사적인 정보를 많이 알았고, 두 사람간의 주말과 저녁 통화가 많았으며, 피해자의 주장과 달리 편의점주와 편의점 회사 직원간엔 '갑을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한 A와 B씨간의 신체 접촉 과정에서 A씨가 웃는 모습을 보인 것(A씨는 헛웃음이라 주장)에 대해 "강제추행이 아니라 이성적 관계에서 장난을 치는 모습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다움은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이런 2심의 판단을 수긍하지 않았다. 피해자로서 마땅히 특정한 반응을 보여야만 피해자로 인정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진술이 수사 초기부터 일관됐던 것과 달리 피고인의 진술이 계속 바뀌었던 점도 피해자의 신빙성을 높게 볼 수 있는 근거라 했다.

검사 시절 성폭력사건을 전담했던 오선희 변호사(법무법인 혜명)는 "성범죄 사건 피해가 100가지라면, 그 피해자의 반응도 100가지로 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며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민 대법관은 지난달에도 성폭행을 당한 다음날 가해자에게 사과를 요구한 피해자의 행동과 언행을 물고 늘어진 피고인에 대해 "피해자의 일부 언행을 문제 삼아 '피해자다움'이 결여되었다는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최성호 경희대 교수는 저서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서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피해자상을 설정해 놓고 그에 맞지 않으면 피해자가 아니라고 성급히 의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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