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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 논설위원이 간다

가해자 중심 감형 사유 아직도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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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안 공청회 남은 논점은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성착취공대위 기자회견. ‘가해자 감형전략 이제는 안 통한다’는 피켓이 보인다. [사진 공대위]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열린 텔레그램성착취공대위 기자회견. ‘가해자 감형전략 이제는 안 통한다’는 피켓이 보인다. [사진 공대위]

지난 9월 대법원 양형위위원회는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제작 상습범에게 최고 29년 3개월의 형량을 권고하는 등 이전보다 처벌 수위를 높인 ‘디지털 성범죄 양형 기준안’을 확정했다.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를 위한 일명 ‘n번방 방지법안’들이 통과됐지만, 실제 가해와 피해에 상응하는 형벌이 선고돼야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사법 불신을 벗을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서다.

영리목적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 #영상물 자발적 회수 감경 사유 안돼 #딥페이크 제작 반포도 형량 높여야 #의견 취합, 다음달 기준 최종 의결

지난 2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이 기준안에 대한 각계 의견을 듣는 공청회를 열었다. 화상으로 열린 공청회 참석자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엄중 처벌을 위해 양형 기준안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앞서 여성의전화 등이 참여한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지난달 20일 연 ‘디지털 성폭력, 양형부당을 말하다: 피해자 관점에서 본 양형기준’ 토론회에서는 여전히 ‘피고인 중심의 양형기준’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2일 공청회 결과를 취합해, 다음달 양형기준을 최종 의결한다. 원칙적으로 양형기준은 참고 사항일 뿐 구속력은 없지만, 양형기준에서 벗어나는 판결을 내릴 때 판결문에 이유를 밝혀야 하는 등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

양형기준 강화, 한 목소리

대법원 양형위원회 공청회 

2일 새 양형 기준안을 발표한 손철우 수석전문위원은 이를 구체적 사례에 적용해 소개했다. 3개월간 청소년 성 착취물 1400건을 제작해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사례다. 당시 재판부는 14세 소녀인 피해자가 자의로 영상물을 전송했고 성 착취물이 유포되지 않은 점을 피고인에 유리한 양형 이유로 봤으나 “(새 양형기준에서는) 어느 것도 양형 인자에 해당하지 않아” 엄중한 처벌이 가능해진다는 설명이다. 새 양형 기준에 따르면 이 경우 형량 범위는 징역 7년~19년 6개월, 상습범이라면 징역 10년에서 29년까지 받게 된다. 다만 감경 인자(형량을 낮추는 사유)에 ‘형사처벌을 받은 적 없음’과 ‘진지한 반성’이 포함돼 있다.

디지털성범죄 ‘감경사유’

디지털성범죄 ‘감경사유’

세부 조항을 두고 참석자들은 기준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한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제작의 하한 형량 기준이 2년 6개월로 13세 이상 청소년 강간(3년)보다 낮은데, 이를 3년으로 상향조정을 검토할 것”을 제안했다. 아동 성 착취물 제작이 실제 강간보다 죄질이 낮다고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75%가 성인”이라며 “아동·청소년 착취물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함께, 성인을 대상으로 한 배포 범죄 또한 형량을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아동·청소년 성 착취물 배포 형량 범위는 기본 2년 6개월~6년이지만, 카메라 등 이용 촬영 배포의 형량 범위는 기본 1년~2년 6개월로 상대적으로 낮다.

이윤정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헤비 업로더, 음란물 사이트, 디지털 장의사업체까지 유착하며 음성적인 산업이 된 현실을 고려해 영리 목적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범죄단체에 준하는 정도로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딥페이크 같은 허위영상물의 제작·배포에 대한 형량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디지털의 특성상 이미 유포된 촬영물을 영구적으로 삭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발적 회수(스스로 삭제·폐기)를 감경 사유에 포함한 대목에 대해선 비판 의견이 많았다. 서승희 대표는 “삭제·폐기 행위는 증거인멸과 구분하기 힘들다”며 “증거인멸을 위해 촬영물을 삭제하는 가해자가 모두 감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물을 특정하기 어렵거나 화질이 나빠서 불법 촬영물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를 감경 사유로 본 것도 문제로 꼽혔다. 신진희 대한법률구조공단 서울중앙지부 변호사는 “가슴이나 치마 속 등 신체 부위만 촬영된 사진이나 동영상의 경우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았을 뿐,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김현아 변호사는 촬영물을 이용한 협박의 경우 일반적인 협박보다 피해가 더 크다면서, 협박이 경미할 경우를 감형할 것이 아니라 협박의 강도가 심한 경우를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대필 반성문도 감형, 문제

텔레그램성착취공대위 토론회 

무기징역이 구형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26일 1심 공판을 앞두고 연일 재판부에 반성문과 호소문을 제출하고 있다. [중앙포토]

무기징역이 구형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26일 1심 공판을 앞두고 연일 재판부에 반성문과 호소문을 제출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달 토론회에서는 증명과 측정이 불가능한 ‘진지한 반성’이 감경 사유로 남아있는 등 여전히 가해자 중심의 양형기준이란 비판이 많았다. 실제 성폭행 혐의로 1심에서 6년형을 선고받은 가수 정준영은 2심에서 ‘진지한 반성’을 이유로 5년으로 감경됐다. 무기징역을 구형받은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등 n번방 피고인들이 연일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하며 감경을 호소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유승희 변호사는, 민변 여성인권위원회가 2018년 11월~2020년 7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11조(성 착취물의 제작·배포)가 적용된 200여건 판결문의 양형 이유를 분석한 결과를 소개하며 “피고인 중심이자 디지털 성범죄라는 새로운 범죄군의 특징을 반영하지 못한 양형기준이란 문제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피고인 중심의 양형 기준은 다른 성범죄에서도 계속 지적되는 문제로, 구체적으로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 피해자의 처벌 불원 및 피해자와의 합의, 오로지 피고인의 사정인 사회적 유대관계, 피고인 가족 또는 지인들의 선처, 피고인에게 부양할 가족이 있는지 여부, 피고인의 불우한 성장 환경 등”이다.

유승희 변호사는 진의를 알 길 없는 무늬만 반성문까지 재판부가 ‘진지한 반성’으로 감경해주면서 “오직 형량을 낮출 목적으로 반성문을 대필하거나, 성교육 감상문이나 사회봉사·기부 등을 반성 자료로 제출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신성연이 활동가도 “반성문 제출이 감형 전략으로 쓰이고 반성문 작성을 대행하는 업체가 성행하는 상황”이라며 “진지한 반성을 어떻게 측량할 것인지, ‘저로 인해 피해 입은 모든 분에게 사과드린다’는 반성이 정말 피해자를 향하는 것인지” 반문했다.

백소윤 변호사는 “사회적 유대관계, 가족들의 선처, 부양할 가족이 있는 점 등이 감경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했다. “가해자가 일상생활에서 범죄 사실을 쉽게 은폐할 수 있는 디지털 범죄에서 어떤 사회적 유대관계가 재범을 방지하고 피고인을 교화시키는 역할을 하는지 타당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텔레그램 성 착취 피고인의 아버지가 동료 공무원들의 공무원증을 수십장 제출해 ‘사회적 유대관계’를 입증하려 했다”며 “이는 가해자 가족이 범죄자인 아들을 위해 공직을 이용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백소윤 변호사는 2018년 11월부터 지난 7월까지 아동·청소년 성 착취 영상 유포 사건의 판결문 200여건을 분석했다. 재판부가 촬영 즉시 전송(소지·유포)· 실시간 시청이 가능한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을 간과한 채, 촬영하고 유포하지 않았다든지 유포 범위가 광범위하지 않다는 이유로 감경한 사례가 다수 발견됐다.

그밖에 디지털 성범죄의 특성상 “피해자가 다수인 경우, 혹은 피해자를 특정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자 일부의 ‘처벌 불원’ 의사만 가지고 형량 감경하는 것도 문제”(유승희)로 지적됐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