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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 정신감정 받아라"…21세기 술탄은 왜 佛과 싸우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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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일 강경 발언으로 유럽 지도자들을 공격하면서 좌충우돌하는 국가 정상이 있습니다. 21세기 술탄(절대권력자), 스트롱맨으로 불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6) 터키 대통령인데요. 

"유럽 지도자들은 파시스트"...연일 강경 발언 #교사 참수테러 후 프랑스 반이슬람 정책에 반발 #터키, '서구에 맞서는 이슬람 수호자' 자처 #악화한 터키 경제에서 국민 관심 돌릴 기회

특히 에르도안 대통령이 요즘 집요하게 공격하는 건 에마뉘엘 마크롱(42) 프랑스 대통령입니다. 에르도안은 최근 마크롱에게 "정신감정이나 받으라"는 독설을 날렸습니다. 왜 이런 발언이 나온 걸까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앙카라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최근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연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앙카라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최근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연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AFP=연합뉴스]

계기는 이달 16일 프랑스 교사인 사뮈엘 파티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에게 참수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범인은 18세 무슬림 소년이었습니다. 파티가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샤를리 에브도의 만평을 수업시간에 보여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이 분노해 테러를 저지른 겁니다.

마크롱은 숨진 파티를 "프랑스의 얼굴"이라며 추모합니다. 그러면서 일부 이슬람 사원을 폐쇄하고 일부 무슬림에 대해 국외 추방 조처를 내립니다. 그러자 친(親)이슬람 주의자 에르도안 대통령이 분개합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오른쪽)과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왼쪽)이 대립각을 세운 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마크롱 대통령이 "나토는 뇌사상태"라고 발언하자 11월 에르도안 대통령이 "당신부터 뇌사가 아닌지 확인하라"는 독설을 날렸다. [AFP=연합뉴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오른쪽)과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왼쪽)이 대립각을 세운 건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마크롱 대통령이 "나토는 뇌사상태"라고 발언하자 11월 에르도안 대통령이 "당신부터 뇌사가 아닌지 확인하라"는 독설을 날렸다. [AFP=연합뉴스]

에르도안은 터키 내 보수파 이슬람교도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터키는 정교분리 국가이지만 에르도안은 이슬람 색채를 강조합니다. 지난 7월 세계문화유산인 성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는 등 노골적인 친이슬람 행보를 보여왔죠.

이슬람에 대한 프랑스의 강경한 대응에 '뿔난' 에르도안은 "마크롱이 파티의 죽음을 반(反)이슬람 정책을 펼치는 기회로 악용했다"고 비난했습니다. 26일에는 "유럽 지도자들은 파시스트"라면서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죠. 그러면서 다른 국가들에게는 프랑스 제품 불매운동을 제안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교사 참수 사건의 빌미가 된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프랑스-터키의 갈등에 기름을 끼얹게 됩니다.

샤를리 에브도는 27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속옷 차림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차도르를 입은 여성의 치마를 들어 올리는 모습의 만평을 올렸습니다. ‘에르도안, 사생활이 정말 웃긴 사람’이라는 제목도 붙였습니다. 이슬람을 존중하라며 유럽 국가를 비판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정작 자신은 이슬람 율법에 맞지 않는 지저분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꼰 겁니다.

터키 대통령실은 즉각 분노했습니다. 이브라힘 칼린 터키 대통령실 대변인은 "개인을 공격하는 것은 유머나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면서 "도덕도, 품위도 없는 이 출판물의 목적은 그저 증오와 적개심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샤를리 에브도의 표지에 에르도안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EPA=연합뉴스]

샤를리 에브도의 표지에 에르도안 대통령을 풍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EPA=연합뉴스]

리비아, 지중해 등 곳곳에서 대립 

에르도안은 이슬람 문제 말고도 여러 곳에서 프랑스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일단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제 미사일을 도입하면서 프랑스·미국 등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의 분쟁으로 지난 6일 포탄을 맞아 폐허가 된 아르메니아의 가옥. [EPA]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의 분쟁으로 지난 6일 포탄을 맞아 폐허가 된 아르메니아의 가옥. [EPA]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터키와 프랑스의 갈등은 여러 지역에서 나타납니다. 리비아, 지중해 동부(터키와 그리스가 대립하는 이 지역에서 프랑스는 그리스를 지지) 등입니다.

지난달부터 시작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도 프랑스-터키의 대립 구도가 드러납니다. 아르메니아계 후손이 많이 있는 프랑스는 아르메니아를, 터키는 같은 튀르크계 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에르도안은 "미국·러시아·프랑스는 이 문제를 30년이나 무시했으니 개입하지 말라"면서 노골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고 있습니다. 한때는 전쟁이 멈추나 싶었지만, 현재 휴전협정은 세 차례나 휴짓조각이 돼 다시 교전 중입니다.

에르도안의 거침없는 행보, 왜? 

왜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제 사회에서 '근육질'을 과시하며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는 걸까요. 여기엔 복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29일 "에르도안은 프랑스 대통령을 공격해 터키의 경제 상황이 악화하고 있는 것에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를 바란다"고 분석했습니다.

실제로 터키 경제는 녹록지 않습니다. BBC에 따르면 터키 리라는 최근 미국 달러당 8.15리라를 기록해 사상 최저치로 내려앉았습니다. 리라화는 올해 들어 가치가 26%나 폭락했습니다. 터키 금융당국은 지난 1년 반 동안 환율 방어에만 1340억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까지 겹쳤습니다. 터키의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11.7%에 달했습니다.

폴리티코는 "프랑스 제품 불매운동 요구는 터키가 국제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맡고 싶다는 의사를 나타낸 것"이라고 봤습니다. 실제로 이에 호응해 쿠웨이트·방글라데시·파키스탄 등에서는 프랑스 제품 불매가 일어났습니다.

에르도안의 노림수는 또 있습니다. 폴리티코는 "에르도안은 프랑스로부터 이슬람을 지키는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다"면서 "종교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에르도안이 꿈꾸는 터키는 사우디아라비아(이슬람 종주국), 이집트(이슬람 수니파 신학의 총본산인 알아즈하르를 보유한 사상적 중심지)와 같은 반열에 선 국가라는 겁니다. 종교를 앞세워 이슬람 내에서 입지를 확고히 높인다는 거지요.

2018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승리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수도 앙카라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는 축구를 잘 해 세미프로 선수로 뛴 적이 있다고 한다. [연합뉴스]

2018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승리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수도 앙카라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는 축구를 잘 해 세미프로 선수로 뛴 적이 있다고 한다. [연합뉴스]

에르도안의 '마이웨이' 행보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2017년 개헌으로 '견제 없는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터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5년이며 중임이 가능합니다. 또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선거를 시행해 당선되면 다시 5년 재임을 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2033년까지 초장기 집권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길거리에서 엽서·참깨 빵 등을 팔며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이스탄불 시장(1994~1998), 국무총리(2003~2014)를 거쳐 2014년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국무총리 시절까지 치면 30년이나 국가 지도자의 자리를 꿰찬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진은 2002년 터키 정의발전당 당수였던 에르도안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사진은 2002년 터키 정의발전당 당수였던 에르도안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에르도안의 이슬람주의 예견한『문명의 충돌』 

터키와 프랑스의 사례를 보면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이 쓴『문명의 충돌(1997)』이 떠오릅니다. 향후 세계에선 문화의 공통성보다는 차이점이 두드러지고, 융합과 공생보다는 마찰과 대립이 일어날 것이란 이론인데요.

새뮤얼 헌팅턴은 "서구가 한때 강력한 문명의 위치를 고수했지만, 앞으로는 이슬람, 중국과 갈등을 빚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에르도안의 이슬람주의가 서구 사회와 '문명의 충돌'을 일으킨 것을 정확히 예견한 셈입니다.

문명의 충돌에 뾰족한 해결책은 없지만, "세계 정치의 다(多) 문명적 본질을 받아들이자"는 저자의 제안은 새겨볼 만합니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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